월간 수필과 비평/수필과비평 신인상 수상작

[수필과비평 2013년 11월호, 제145호 신인상수상작] 나는 음치였다 - 김애련

신아미디어 2013. 11. 19. 08:14

"사람은 노력하면 안 되는 게 없는 것 같다. 단 한 번뿐인 내 인생에 있어 나는 언제나 적극적으로 꿈과, 희망과 열정을 가지고 있었던 터다. 타고난 끼는 누구보다도 많다. 노래까지 잘 불렀으면 내 인생이 어찌 될 뻔했을까.  새로운 곡 두 곡을 더 배웠더니 이제는 친구들이 노래방에 가자는 소리를 안 한다. 즐겨 부르는 <이별>과 <사랑의 미로>를 흥얼거리면서 ‘나는 음치였다. 하지만 지금은 음치가 아니고 그저 노래를 조금 못 부르는 사람일 따름이다.’라고 외치고 싶다."

 

 

 

 

 나는 음치였다     김애련


   내성적인 나는 어릴 적에 수줍음이 많았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성격이 바뀌어 갔지만 속에서는 뜨거운 감자 같은 열정이 있는데 밖으로 표현하지 못해서 병이 날 지경이다. 내가 생각하는 지금 나는 리더십도 있고 열정도 있지만 노래는 여전히 잘 부르지 못한다. 어려서부터 부모님이 노래 부르는 것을 한번도 들어 본 적이 없다. 부모님을 닮아서 형제들 모두가 노래를 못한다. 음치 가문의 유전을 확실히 물려받았다.
   가는 곳마다 회장직을 맡으니 노래쯤은 잘 부를 것이라고 여기는 모양이다. 자신들의 믿음을 확인이라도 하듯 내게 노래를 시켜보지만 한 곡을 듣고 나면 다시는 시키지 않는다. 음정 따로 박자 따로여서 듣는 사람이 괴롭다. 관광버스를 타고 가는 여행은 가능한 가지 않았다. 부득이 노래를 하게 되면 그때부터 주변의 경치는 눈에 들어오지 않고 돌아올 때까지 기가 죽는다.
   나와 반대로 남편은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르나 음악을 잘한다. 연애 시절엔 하모니카를 불었고 기타를 쳤고 지금의 색소폰 실력은 남들이 알아준다. 대중가요라면 무슨 곡이든지 망설이지 않는다. 부부모임 때 노래방에 가면 남편은 평소와 달리 내 존재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신나게 논다. 집에 갈 때쯤 되어서야 나를 찾는다. 노래방 기계가 보급된 후부터 섬 지방의 할머니조차 모두 가수로 변했지만 나는 타고난 음치에서 좀처럼 벗어날 수 없었다.
   내가 음치라는 사실을 초등학교 3학년 때 알았다. 오락시간에 노래 시합을 하였다. 반장이 먼저 부르고 부반장인 내 차례가 되었다. 당연히 노래는 엉망이 되었다. 갑자기 친구들은 기가 막히는지 모두 말문을 잃고 분위기가 조용해졌다. 나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부끄러워서 얼굴이 달아오른다.
   십오 년 전 매미 소리 요란한 한여름이었다. 봉사 단체를 구성하면서 기금 마련에 고심을 하고 있을 때였다. 무엇을 하면 될까 싶어 궁리한 끝에 풍물패를 만들기로 했다. 봉사 회원 삼십여 명을 데리고 동래 금강원에 있는 민속관에 갔다. 일흔이 넘은 무형문화재 선생님을 섭외하여 장구, 징, 북, 꽹과리를 배우기로 하였다.
   각자 맡은 분야에 열심이었다. 꽹과리를 배워야 하는 나는 진퇴양난에 빠져버렸다. 선생님은 악보도 없이 귀로만 듣고 쳐보라고 하였지만 무슨 소리인지 제대로 구분할 수가 없었다. 듣는 것조차 어려웠다. 꽹과리는 회원 한 명과 같이 배웠지만 생소한 소리에 솜씨는 늘지 않고 스트레스만 쌓여갔다. 상쇠를 하지 않으면 어려운 꽹과리를 담당하지 않아도 될 텐데 무더운 여름날 불쾌지수만 높아갔다.
   풍물 선생님은 많은 회원 앞에서 수시로 망신을 주었다. 상쇠를 할 사람이 이렇게 못하면 어떻게 리더를 하겠느냐는 것이다. 매일 그런 일이 되풀이되었다. 마치고 내려오면 가슴에 쌓인 스트레스를 분풀이하듯 팥빙수로 달랬다. 그날 이후 여름만 되면 팥빙수를 즐겨 먹는 버릇이 생겼다.
   명색이 회장이어서 잘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모든 식구들이 잠든 밤에 일어나서 결혼한 아들이 사용하던 방에서 플라스틱 뚜껑과 나무젓가락으로 가족들 몰래 밤마다 도둑 연습을 했다. 한 달 가까이 연습을 하니 가락이 조금씩 귀에 들어왔다. 낮에는 금강공원 민속관에서 팔이 아프도록 꽹과리를 치고 또 쳤다. 밤이면 나무젓가락으로 팔이 시큰거리도록 두드렸다. 마침내 굿거리, 자진모리, 휘모리를 구별하여 치게 되었고 선생님도 종종 웃음을 띠곤 했다. 성주풀이, 지신풀이를 배워서 행사 때마다 풍물패를 끌고 상쇠 놀이를 7년이나 했다. 정월 대보름이면 일주일간 회원들과 연제구를 휩쓸며 다녔다. 몸은 조금 피곤하지만 마음은 즐겁기만 했다. 수입도 짭짤하여 기금 마련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제는 후배들이 잘 이어받아 정월만 되면 성주풀이 지신을 밟아서 상점이나 관공서의 액을 물리치고 행운을 가져다주는 풍물패의 맥을 이어오고 있다. 정월 대보름이 되어 멀리서 풍물패 소리가 들려오면 나도 모르게 두 팔에 힘이 들어간다.
   요즘도 친구들이 뽕짝이나 트로트를 잘 따라 부르는 것을 보면 참으로 부럽다. 나는 언제쯤 저렇게 노래를 잘 부를 수 있을까? 나도 배우면 저렇게 될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노래 솜씨는 타고나야 된다는 게 내 굳어진 생각이었다. 연말이 다가오면 길을 가다가도 거리에 음치 탈피라고 쓰인 광고를 보고 전화를 하였지만 용기가 없어서 가보지는 않았다. 결국 멋진 곡 한번 뽑지 못하고 세월만 보낼 것 같았다.
   대단한 결심을 했다. 더 늦기 전에 음치를 탈피하려고 자치센터에서 운영하는 노래교실에 나갔다. 처음에는 몰랐으나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나아졌다. 이제는 노랫가락이 귀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노래방에 가면 친구들이 날 놀린다고 <빨간 구두 아가씨>나 <회전의자>를 불러보라고 한다. 두 곡은 딴 노래보다 조금 쉬워 십 년 전에 따라 부르던 노래를 리바이벌 하고 있다. 지금은 전보다 조금 잘 부르는 곡을 두 곡 만들었다. 패티김의 <이별>과 최진희가 부른 <사랑의 미로>이다. 이 두 곡을 만들기 위해 너무 오랜 세월이 걸렸다.
   사람은 노력하면 안 되는 게 없는 것 같다. 단 한 번뿐인 내 인생에 있어 나는 언제나 적극적으로 꿈과, 희망과 열정을 가지고 있었던 터다. 타고난 끼는 누구보다도 많다. 노래까지 잘 불렀으면 내 인생이 어찌 될 뻔했을까.
   새로운 곡 두 곡을 더 배웠더니 이제는 친구들이 노래방에 가자는 소리를 안 한다. 즐겨 부르는 <이별>과 <사랑의 미로>를 흥얼거리면서 ‘나는 음치였다. 하지만 지금은 음치가 아니고 그저 노래를 조금 못 부르는 사람일 따름이다.’라고 외치고 싶다.
   다음엔 남편의 특기인 하모니카에 도전하고 싶다.

 

 

 

김애련  -------------------------------------------
   부산 출생.  부산대학교 행정대학원 졸업. 부경수필아카데미 회원.  전)부산광역시 연제구 구의원.


 

당 선 소 감
   달리고 싶다. 달리다가 넘어져도 일어서서 또 달리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지금, 걸음을 배우는 아이처럼 첫발을 내딛고 있다. 올바른 걸음마를 배우기 위해선 넘어지고 또 일어서고 할 것이다. 똑바로 걷고 달릴 수 있을 때까지 멈추지 않고 달리고 싶다. 그러면 언젠가 힘껏 앞으로 나아가리라 믿는다.
   수필과 동행하면서 마음이 넉넉해졌다. 이 풍요로움을 많은 사람과 나누며 살고 싶다. 말없이 든든한 지원자인 남편에게 고마움을 전하며, 부족한 저를 이끌어 주신 지도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