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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문학 2013년 여름호, 이 시인을 주목한다/이병일] 나의 정원이 빛날 때 외 4편 - 이병일

신아미디어 2013. 11. 1. 08:06

"이병일의 시는 서정과 자연에 강한 애착을 보이고 있지만 일반적인 서정의 범주에 머물지 않는다. 그의 시는 확대된 외연을 지향하며 자연이 전달하는 단순한 감각을 지양한다."

 

 

 

 

 

 

 나의 정원이 빛날 때 외 4편     /  이병일

 

 

잘리기 위해 자라는 것들이 있다
멸족을 위해 자라는 초식동물의 이빨은 녹이 슬지 않지만
영원을 위해 단단하게 입을 다물고 있는 전지가위는 녹청이 쉽게 스몄다

 

그러나 풍요로운 초록 예찬으로 나의 정원이 빛날 때
어제 내린 국수비가 작은 도랑 하나를 그었고
청개구리는 젖은 구기자나무 한 그루를 뱉어내기도 했다

 

그때 전지가위는 땅강아지들이 땅 그늘 속에서 미끄러지듯
적들의 핏속으로 떠나는 작은 악행의 기록을 남기고 싶어
에덴의 세계를 겁도 없이 창조하기 위해 가위질을 시작했다
전지가위는 상처의 테두리가 아름다운 시로 쓰일 때까지
때때로 해와 달의 운행을 멈추게 했고
꽃대 흔들고 가는 바람도 없는, 허방의 집을 짓기도 하였다

 

목 잘리고 몸통마저 잘린 풀과 나무와 꽃들의 흐느낌은
젖은 이승의 그림자를 말리고, 날선 향기는
더 낮게 더 낮게 그늘을 키우는 법을 터득하기 시작했다
그때 생활이 없는 정원사는
가위질이야말로 정원의 꿈을 훈육시키는 방법이라고 했다
전지가위는 칼칼한 아가리에 식물성 기름을
잔뜩 두르고
이 몇 개 빠진 새파란 초승달 하나를 숨기고 있었다

 

그날 밤 잘린 가지 위에서 꽃잎모양 풀벌레들이 울었다

 

 

 

 

 구제역과 저승사자와 봄눈

 

 

   햇빛 한번 본 적 없는 돼지들은 분홍빛이다 맑고 까만 눈동자와 콧구멍이 빛의 윤곽을 느끼는지, 꼬랑지가 명랑하다 난데없이 파놓은 비늘 구덩이 속으로 분홍 돼지가 간다 무릎 꿇고 엎드려 주둥이 한번 벌렁거리고, 진흙냄새 숨 막히도록 파고들지만, 더운 숨은 침묵의 수렁 속으로 간다

 

   포클레인은 뒷걸음치는 분홍 돼지들을 매장시킨다, 그러니까 봄눈 찔끔 비치는 그 사이, 현기증이 낙차 큰 슬라이더로 떨어진다, 다만 먹먹하고 아름다운 눈꺼풀 안팎의 세계를 잊을 수 없었는지, 분홍 돼지들은 눈자위 위로 발기된 기억을 세운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이제 죽음에게 예를 갖추겠다는 듯 분홍 돼지는 물컹한 쾌락과 고통의 거품을 문다, 목젖마저 그렇게 입 다물고 있으니, 얽히고 설켜 있던 분홍 돼지들은 이제 굽을 버리고, 진흙의 얼룩무늬가 될 것이다 구더기들이 더 이상 파먹을 육체가 없을 때까지

 

   사방이 어두워지지 않고서는 깊어질 수 없는 구제역의 밤, 분홍 돼지의 비명은 아직도 멀리 가지 못했는지, 저승 빛 하늘이 갈라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때 두리번거리는 저승사자는 갓을 고쳐 쓰고, 더럽지만 불길하게도 아름다운 봄눈으로 깊이, 무덤을 묻어준다 그러나 더 깊이 묻어주려 해도, 또 못 볼 것들이 자꾸만 삐져나온다

 

 

 

 

 기린의 시

 

 

1
카렌족 소녀들의 목엔 놋쇠의 링이 친친 감겨 있다네
어깨뼈가 폭삭 주저 않는 것이 아니야
목이 길어지고 있다고 믿는 아름다운 가정법의 세계랄까

 

목덜미를 움켜쥐는 고혈압은 아무도 모르게 상승했지만
목선만은 아무렇지도 않게 빛의 근육으로 꿈틀거렸다네

 

물병자리가 갈증의 힘으로 켜켜이 어둠을 켜듯이
카렌족 소녀들은 목뼈의 통증으로 사춘기의 밤을 견디었다네
목뼈는 계속해서 자랐지만 곡선의 높이를 헤아릴 수 없었다네

 

마캄나무 진액으로 얼굴에 그려놓은 나뭇잎이 팔랑거릴 때
난데없이 나뭇잎을 비집고 들어오는 어스름 꽃무늬가 필 때
소녀들은 깊은 초저녁의 눈으로 사납게 일어서는 별을 품는다네

 

그리하여 무너지지 않는 신화를 새로 잣는 소녀들의 손가락은
핏물 딱지가 떨어지지 않거나 한쪽으로 구부러져 있다네
돌과 나무와 진흙으로 만든 태곳적 옛집을 그려놓았다네

 

2
   하루해가 저물 때까지 목 한번 가누지 못하는 카렌족 소녀들아, 그대의 피가 그믐밤에 가까스로 존재하는 기린의 시를 그리워한다고 말하지 않겠다 어중이떠중이인 혀 밑에 돌이 생길 때까지, 나는

 

 

 

 

 설국이 오월을

 

 

까맣게 그을린 노인은 설국이라고 했다

 

해거름 그림자 묽게 내리는 먼 곳이라고 했다

 

아카시아 밥풀때기 앞에서 노인은 입맛 다시듯

 

아카시아 밥풀때기에 향기의 물불이 차갑게 붙는 오월을 눈에 담는다

 

노인은 검은 벌떼들의 행동반경에 대해 떠올린다 아카시아 나뭇가지가 찢어지도록 벌떼들이 반달곰의 머리통만한 집을 짓는 때를 생각한다 노인의 몸속엔 시고 달고 그런 꿀의 혼이 들어 있으니 붕붕거리는 곡哭으로 설국으로 떠메고 갈 벌떼들을 기다린다

 

하지만 저승은 너무나 멀고 현기증 이는 바깥에 있다 노인은 죽음을 하찮은 것으로 만들기 위해 희디흰 꽃길이 되었다 조등보다 환하게 취한 벌떼들이 노인의 혼까지 허물어버렸다고 했다 죽은 것들이 죽지 않는 설국雪國이 오월을 통과해간다

 

 

 

 

 투견의 그것처럼

 

 

저물 무렵, 우리 안의 투견

 

느물느물 더럽게 죽어간다

 

똥이 가물가물 삭듯이 그러나

 

피비린내 아직 살아 있지만

 

눈가의 똥파리들이

 

동공 풀린 눈동자에 박힌 저승을 빨아먹는지

 

작은 눈을 요리저리 굴린다

 

불한당의 주린 입은

 

죽어도 매초롬하게 못 죽는다

 

투견의 그것처럼 더위도 힘 빠질 무렵,

 

질컥하고 끈끈한 피오줌이

 

칸나의 꽃술로 옮겨 붙어가고 있다

 

칸나의 환함으로 거듭 태어나고 있다

 

칸나의 저녁이

 

개밥그릇 테두리 이빨자국을 핥을 때

 

그 반짝임의 깊이로 투견의 나이를 세어본다

 

 

 

 

이병일  --------------------------------------

   2007년 《문학수첩》 등단,  시집 《옆구리의 발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