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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비평 2013년 8월호, 세상마주보기] 그녀와 나랑은 - 신정호

신아미디어 2013. 10. 30. 08:20

"어딘가로 떠난다는 건 나를 설레게 한다. 가끔 하늘을 나는 비행기만 보아도 내 마음은 어느새 여행길에 앉아있으니까. 이번 여행은 마음이 맞는 친구와 짜인 틀을 벗어나 발길 가는 대로 구경하고, 서로의 내부에 가라앉아 떼어지지 않는 응어리들을 풀어내기도 하고 토닥거려주기도 하면서, 모처럼 복잡한 일상을 벗어난 편안한 여행을 했다. 그녀와 나랑은 오래도록 잊지 못할 잔잔한 추억을 안고 서울로 향하는 비행기 트랩에 올랐다."

 

 

 

 

 

 그녀와 나랑은     신정호

   그녀와 함께 도착한 후쿠오카의 하카타 공항은 작았지만 깨끗하고 아담한 공항이었다.
   지난겨울에 계획된 여행이었는데 5월을 바라보는 오늘이 되어서야 이루어져 그녀와 나는 2박3일의 여행을 하게 되었다. 그녀는 나보다 어렸고, 여자인 내가 보기에도 날씬하고 자그마한 체구에 세련된 미모를 갖춘, 누가 봐도 보호해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귀여운 여인이었다. 밝게 웃으며 종달새처럼 지저귀는 수다(?)는 나의 기분을 유쾌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남편은 그녀를 천사라고 했단다. 그 얘기를 전해들은 나는 바로 내 남편에게 “나는 당신에게 뭐죠?” 하고 물었다. “당신도 옛날엔 천사였지.” 한다. “그럼 지금은요?” 나의 험상궂은 표정이 감지되었음인지 머뭇거리며 짐짓 웃음 띤 얼굴로 지금도 천사란다. 억지 춘향인 걸 왜 모르랴. 하긴 내가 남편에게 천사이든 아니든, 함께한 사십 년 세월이 달라질 게 있겠는가.
   천사라 불리는 그녀와 함께 예약된 호텔로 가서 체크인하고 나니 어느새 주변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저녁도 먹을 겸 가까운 캐널시티로 갔다. 캐널시티는 내부에 구불구불 흐르는 인공 운하가 있고 주변에 호텔, 극장, 레스토랑, 쇼핑몰이 어우러져 있는 복합시설로 평소엔 많은 사람들로 북적대는 곳이라는데 그날 저녁은 왠지 한적하고 썰렁했다. 그녀는 여러 번 이곳을 여행 온 터라 이곳 지리에 밝아 내 손을 잡아끌며 안내를 해 주었다. 어디엔 무엇이 맛있고, 어디엔 애들 용품이, 그릇은 어디 가면 예쁜 게 많고 등등…….
   배가 고파 저녁을 먹기로 하고 여기저기 식당가를 기웃거리다 결국 피자집으로 갔다. 사람이 많아 겨우 자리 잡고 앉아 일본어를 모르니 메뉴판의 사진을 보며 어림짐작으로 두 개를 주문했다. 피자는 사이즈가 작은 접시 크기에 우리나라의 짬짜면처럼 절반은 가지, 토마토가 토핑 돼 있고 반쪽엔 브로컬리와 안초비(우리의 멸치젓)가 얹혀있어 독특한 맛을 냈다. 그녀는 나와 달리 새 모이처럼 먹고 앉아 잘 먹는 내 앞으로 접시를 밀어주었다.
   다음 날 오전, 우리는 가까운 노코노시마 섬에 가기로 했다. 이곳은 외지에서 온 관광객들은 아직 잘 모른다고 했다. 택시를 타고 해변인 마리노아 지역으로 가서 페리를 타고 10여 분 정도 가니, 섬에 도착했고 거기서 또 셔틀버스를 타고 산 정상으로 올라갔다.
   온 산이 꽃으로 덮여 있었다. 여기는 봄엔 수선화, 진달래, 철쭉, 여름엔 해바라기, 가을엔 코스모스 꽃밭이 장관이라고 했다. 우리의 눈앞엔 양귀비과의 포피, 하얀 마가렛, 진홍의 철쭉이 한창이었다. 사이사이 푸른 풀밭에 예쁜 모양으로 가다듬은 나무들과 이름 모를 야생화도 펼쳐져 있었다. 처음 들어올 땐 입장료가 조금 비싸다는 생각을 했는데 눈앞의 아름다운 광경에 입을 못 다물고 탄성을 질렀다. 우리는 넓은 잔디밭 고목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 섬을 나오며 그곳에서만 맛볼 수 있다는 사이다와 햄버거를 맛보았는데 야릇한 향 때문에 우리 입맛에는 맞지 않았다.
   노코노시마 섬에서 나와 톈진 역으로 출발. 먼저 점심을 먹기로 했다. 집에 남아 있는 그녀의 남편이 마치 원격조정을 하듯 어디에 가서 우동을 먹고 어디에 가면 맛있는 게 요리를 먹을 수 있다고 알려준 걸 참고 삼아 점심은 우동을 먹기로 했다. 조금 헤매다 찾아간 그 우동집은 손님이 가득 차 있었다. 맛이 있다고 소문난 집이라 번호표를 받고 순번을 기다렸다 먹는단다. 그날은 조금 늦은 시간이라서인지 남은 한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주문한 주 메뉴 외에 유부초밥이랑 어묵 등은 자유롭게 가져다 먹고 계산할 때 추가시켰다. 내가 주문한 것은 명칭은 잊었는데 삶아낸 하얀 우동국수를 간장 소스에 적셔 먹는 것으로, 우동의 쫄깃한 면발과 씹을수록 고소한 맛, 그리고 상큼한 간장소스가 어우러져 오래도록 맛의 여운이 나를 감쌌다.
   그녀의 남편 덕분에 맛있는 점심을 먹고 톈진 역 주변을 구경했다. 이곳은 후쿠오카 중심으로 큐슈의 최고의 상업지역이란다. 지하상가, 백화점, 쇼핑몰로 이어져 있어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고 화려한 물건으로 채워져 있어 윈도우 쇼핑하기엔 안성맞춤이었다. 특히 아케이드 형태의 ‘간코도리’는 지붕이 있어 비나 눈이 와도 쇼핑하기에 좋고, 각종 상점의 다양한 물건이 우리의 눈을 끌었다. 그러나 우리나라 물건도 좋은 게 많고 비슷한 형태의 쇼핑몰도 있어 선뜻 사고 싶은 건 없었다. 그래도 빈손은 서운할까봐 외손자 줄 선물과 앙증맞은 모양의 화과자 몇 개를 샀다.
   저녁은 역시 그녀 남편의 코치대로 게 요리 집으로 가서 세트 메뉴로 이어지는 온갖 게 요리를 섭렵하고 배가 부른데도 마지막 끓여준 죽까지 먹고 배를 두드리며 나왔다. 우리의 등 뒤로 ‘아리가도 고자이마스’를 외치면서 배웅하는 늙수그레한 종업원에게 우리도 고마운 마음을 담아 ‘사요나라’를.
   어느새 이틀이 훌쩍 가버린 저녁. 내일이면 떠난다 생각하니 뭔가 또 다른 추억을 남겨야 할 것 같아 어두워진 거리에 줄 늘어선 이자카야(선술집)를 찾았다. 생맥주를 앞에 놓고 우리는 세상 돌아가는 얘기, 서로의 얘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쉰이 넘은 지금까지 남편과 두 딸을 위해 헌신했단다. 집안일은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육아, 청소, 빨래, 요리까지 직접 해야만 직성이 풀려 거의 집안에서만 시간을 보냈는데 요 근래에 와서 이렇게만 살아온 게 조금 억울한 느낌이 들어 가끔은 집안일에 손을 놓고 여행도 다니고, 친구도 만나고, 운동도 하다 보니 이렇게 재미난 세상도 있었나 싶다고. 그녀와 나랑은 친구의 친구를 통해 알게 되었는데, 몇 번 만나고 죽이 맞아 친구를 제치고 둘이서 여행까지 오게 된 걸 보면 전생에 어떤 인연이 있었나 보다.
   후쿠오카의 밤은 깊어가고 그녀와 나랑은 발그레해진 얼굴로 가로등이 빛나는 길을 걸으며, 스물아홉의 나이로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순국한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을 나지막이 읊조렸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憧憬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딘가로 떠난다는 건 나를 설레게 한다. 가끔 하늘을 나는 비행기만 보아도 내 마음은 어느새 여행길에 앉아있으니까. 이번 여행은 마음이 맞는 친구와 짜인 틀을 벗어나 발길 가는 대로 구경하고, 서로의 내부에 가라앉아 떼어지지 않는 응어리들을 풀어내기도 하고 토닥거려주기도 하면서, 모처럼 복잡한 일상을 벗어난 편안한 여행을 했다. 그녀와 나랑은 오래도록 잊지 못할 잔잔한 추억을 안고 서울로 향하는 비행기 트랩에 올랐다.

 

 

신정호  -------------------------------------------
   ≪수필과비평≫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