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과비평 2013년 8월호, 세상마주보기] 봄을 만나고 싶다 - 김혜숙
"영원히 해결하지 못한 숙제가 가슴을 짓누르고 있다. 내 삶 속의 봄은 고통이고 분명 행복해했던 나의 봄은 무너져 버렸다. 나의 봄을 찾고 싶다."
봄을 만나고 싶다 - 김혜숙
아침 햇살과 함께 투명하게 비추던 태양은 무슨 심술인지 구름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봄만 되면 겨울 끝을 잡고 놓지 않으려고 애쓰는 바람은 불지 않고 그래도 따스한 봄볕의 온기가 거리에 가득하다.
텅 비어버린 듯한 거리에서 사람 찾기가 오늘은 참으로 힘들다. 요즘 이렇게 거리가 한가한 이유는 아마 동네 주민의 인구수도 있겠지만 남쪽으로 다들 꽃을 찾아 여행을 갔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오늘만 해도 내가 아는 몇몇분들이 이미 새벽에 남도를 향해 떠나갔으니까.
우연히 방송에서 봄우울증 환자가 급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유는 스트레스와 외로움이 주요 원인이라고 한다. 습관처럼 ‘봄이 좋아.’ ‘봄은 나를 행복하게 해.’라고 말했었던 황홀한 봄이 이토록 허무하고 우울해지는 이유는 나도 봄우울증 환자에 포함된 것 아닐까?
가까이에 있는 공원을 봐도 연둣빛 물결이 당장이라도 산을 정복할 듯한데 나의 봄은 무너져가고 있고 오후엔 어김없이 불어오는 봄바람이 밖으로 밖으로 나를 끌어내려고 무섭게 덤비는 듯하다.
가끔은 시집을 꺼내보며 혼자 낭독도 하고 감미롭고 자극적인 시어에 심취해서 시어에 그림을 그려가며 행복해했던 그 모든 감성들은 사그라져 버리고 눈으로 문자 그 자체만 읽어 내려가고 있다.
내 봄의 우울증을 감당할 수가 없다. 흔하게 듣던 익숙한 봄의 음악보다도 강하게 뒤틀리는 듯한 자극적인 CD 쪽으로 손이 가 그 음악에 취해버리면서 알 수 없는 슬픔과 허무함에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 않다. 내가 해야 되는 일상의 모든 것들조차도 아무 의미가 없고 겨우내 얼어붙었던 선인장이 누런 가시만을 남기고 무너져 내리듯 나의 봄이 무너지고 있다. 그렇다, 생각해보니 내 우울증의 원인은 봄이 왔지만 내 마음속 봄이 오지 않은 까닭에 있는 것이다.
B 선생님은 나의 학창시절 국어선생님이셨고, L 선생님은 나를 문학세계로 이끌어 주신 분이시다. 두 분은 20년지기 친구로서 자타가 인정하는 관계였다. 그러나 L 선생님의 충격적인, 절망에 가까운 소식이 들렸었다. 암, 그것도 가장 예우가 좋지 않은 췌장암이라는 소식에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다. 그 다부진 체격에 호탕한 성격, 쓴소리 바른 소리 잘하시고 항상 문인 양성에 정성을 다하였던 선생님이라서 암이라는 소식은 우리들에겐 절망 그 자체였다.
L 선생님은 두 번의 수술과 방사선 항암치료를 적극적으로 받으셨고 운동과 식이요법으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셨다. 방사선치료를 받고 오시는 날엔 주위 분들과 식사를 하고 차도 마시면서 일상적인 생활 속으로 들어오려고 노력을 많이 하셨다.
어느 날, 지인들과 함께 청운사에서 활짝 핀 백련을 감상하며 담소를 나누시던 그 모습은 오랜만에 뵙는 L 선생님의 예전 표정이셨다. 그 자리에 B 선생님도 함께했다. 주차장까지 걸어오는 길에 B 선생님은 나와 함께 걸으며 L 선생님과의 20년 우정을 더욱더 강조하시며 20년 동안의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그러나 20년 지기의 우정은 그때 거기까지였었던 것 같다.
L 선생님은 더욱더 야위어 가시고, 힘들어하시는데 B 선생님은 20년 우정을 순식간에 버리고 L 선생님에 대한 알 수 없는 모함의 말들을 입 밖으로 쏟아 내셨다. 혼자 생각하고 혼자 결론을 내는 B 선생님의 성품으로 인해 투병중인 L 선생님은 더 고독해지셨다.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누가 대신 앓아 줄 수 없는 게 병이 아니던가?
정신력과 몸이 점점 작아지는 L 선생님은 차마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B 선생님께 난 그랬다. 서운하고 속상하신 일 있으면 지금이라도 L 선생님께 말씀드리라고, 그러지 않으면 그만 잊고 여기서 멈추시라고. 그러나 B 선생님이 쏟아내는 말들이 많을수록 L 선생님은 더 힘들어하시고, 쓸쓸해하셨다. 혼자 돌아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지켜볼 수 없는 커다란 슬픔이었다.
난 B 선생님의 말들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은가 하는 정의감에서였다. B 선생님은 “니가 내 제가 맞아?” 했고 난 선생님이 맞냐고 받아쳤다. 하지만 나의 판단이 잘못이었다. 일은 눈덩이처럼 커져버렸고 두 분 선생님의 20년 우정은 허공 속으로 먼지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팝콘 같은 하얀 벚꽃이 산과 들 온통 세상에 가득할 때 L 선생님은 영원히 잠드셨다.
B 선생님의 말들은 내가 듣고도 못 들은 척했다면, B 선생님의 성품이 그려러니 하고 그냥 묵인했다면 두 분의 20년 우정이 이렇게 무참히 깨지지는 않았을까.
영원히 해결하지 못한 숙제가 가슴을 짓누르고 있다. 내 삶 속의 봄은 고통이고 분명 행복해했던 나의 봄은 무너져 버렸다.
나의 봄을 찾고 싶다.
김혜숙 ------------------------------------------
≪수필과비평≫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