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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비평 2013년 8월호, 수필가가 감동한 명수필: 박재식의 <대장닭>] 대장닭의 흰 깃털 - 김이경

신아미디어 2013. 10. 25. 08:02

"우리에겐 예부터 장유유서의 질서가 있었고 효친, 경로의 풍습이 있었다. 권좌에서 물러난 노인을 구석빼기로 몰아내는 것이 아니었다. 옛날 어른들은 기침 소리, 지팡이 소리, 담뱃대 두들기는 소리만으로도 집안을 다스렸다. 강약의 질서로는 한 주먹에도 차지 않을 허리 굽은 노인이 그 자리에 계시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었다. 그런데 세상이 자꾸만 흔들린다."

 

 

 

 

 

 

 

 대장닭의 흰 깃털     -  김이경

 

 


대장닭     /  박재식


   ‘장닭’은 수탉의 잘못된 일컬음이라고 사전에 나와 있다. 그러나 내가 자란 고장에서는 수탉은 모름지기 장닭으로 통한다. 다만 수탉은 암수를 가릴 때 이례적으로 쓰일 따름이다.
   집에서 닭을 키워보면 수컷을 일컬어 장닭이라고 한 선지자의 적실한 언어 감각에 탄복할 수밖에 없다. 장닭의 ‘장’은 한자의 ‘將’, ‘丈’ 혹은 ‘壯’에 연원을 둔 것이 아닌가 싶다. 암탉의 무리를 이끌고 다니는 늠름한 모습이 장군다우니 ‘將닭’이요, 그 자태가 암탉에 비해 출중하게 의젓하며 장부다우니 ‘丈닭’이요, 권속을 거느리는 풍도가 미물 같지 않게 장하고 갸륵한 바가 있으니 ‘壯닭’으로 명명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고 짐작해 보는 것이다.
   우리 집의 대장닭은 휘하에 수탉 두 마리와 암탉 열 마리를 거느리고 있다. 훤칠한 목줄기에 떡 벌어진 가슴팍과 번지르르한 붉은 깃털에 검은 색 멋진 꼬리를 지닌, 내가 보기에도 반할 만큼 탐스럽게 잘생긴 수탉이다. 숫제 ‘미스터 수탉 선발대회’ 같은 것이 있다면 출품해 봄 직도 한 그야말로 닭의 남성미를 깔축없이 갖춘 훌륭한 수탉인 것이다.
   그 잘생긴 허우대로 뭇닭을 거느리며 뜨락과 텃밭을 무소부지無所不至로 활보하는 모습은 가히 사위를 제압하고 남음이 있을 만큼 위풍이 당당하다. 그의 걸음걸이를 관찰하면 장부다운 풍모가 한층 돋보인다. 간대로 서두르는 법 없이 한 자국 한 자국을 점잖게 옮겨 놓는 발걸음이 지체 높은 옛 선비의 그것을 방불케 하고, 유난히 큰 볏을 연신 너풀거리며 기웃기웃 좌우를 경계하면서 걷는 폼은 그 옛날 투구와 패도를 장착한 장군이 군졸을 이끌고 앞장서 가는 위용을 닮았다.
   그러나 그가 대장닭의 이름에 손색없는 구실을 하는 소이가 결코 그 빼어난 허울이나 위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권솔을 보살피는 매너와 책임의식이 참으로 장자답다.
   모이를 뿌리면 결코 먼저 덤비는 법이 없다. 뭇닭이 몰려들어 정신없이 쪼아 먹는 이윽한 동안을 그는 우뚝 고개를 쳐들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경계 태세를 한층 가다듬는 것이다. 향응 중에 외적의 기습을 받고 망한 우리네 인간사의 숱한 패장들에 비하면 얼마나 슬기롭고 믿음직한 수장인지 모른다.
   암탉을 거느리는 매너 또한 우리 인간의 남정네들이 배울 바가 많다. 항상 넓은 가슴과 푸근한 깃으로 감싸듯 하며 거느리는 것이다. 알자리를 마련해 놓으면 점검이라도 하듯 으레 제가 먼저 들어가서 앉아보고 나온 다음에야 암탉을 들여보낸다. 그리고는 알을 낳는 동안 줄곧 둥지 곁을 지키며 떠나지 않는 것이다.
   한번은 개집에 매어 놓은 사나운 진돗개의 목줄이 풀려 뜨락에서 평화롭게 노닐던 닭들을 개가 습격하는 바람에 큰 소동이 일어난 적이 있다. 평소 같으면 대장닭의 통제 아래 무리를 지어 개집 근처, 그러니까 개의 목줄이 미치는 거리의 한계선 밖 언저리를 얼찐거리며 약을 올리곤 하던 터수이지만, 일단 그 안전판이 무너진 마당에서는 걷잡을 수가 없다. 처음 맞닥뜨린 암탉 한 마리가 비명소리와 함께 피투성이로 쓰러지고, 남은 닭들은 혼비백산 사분오열로 분주한 난장판이 벌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 판국에서도 대장닭만은 그 자리를 맴돌며 뭇닭들의 피난을 재촉하듯 꼬꼬댁 소리를 부산하게 내지르다가, 위기일발 피격 직전에 이르러서야 요란한 날갯짓과 함께 멀리멀리 달아나는 것이었다.
   이런 대장닭은 그만큼 권속을 다스리는 카리스마 또한 대단하다. 그가 모이를 줍기 위해 모이판에 다가서면 정신없이 모이를 쪼던 뭇닭들은 일제히 식사를 중지하고 몇 걸음 물러나서 자리를 양보하게 마련이다. 그러고서 얼마 동안 기다렸다가 대장닭의 식음이 삼매경에 들 즈음해서야 비로소 조심스레 다가와 회식에 동참하게 되는 법이다. 그런데 부주의하게도 이 예도를 망각하고 버릇없이 곁에 와서 함부로 부리를 놀리다가는 그것이 비록 애첩 격인 암탉이라 하더라도 치도곤을 맞고 쫓겨나는 것이다.
   총중에서 무엇보다도 불쌍한 존재는 두 마리의 수탉이다. 그들은 언제나 대장닭의 눈치를 슬슬 살피면서 겉돌아야 한다. 한데 어울려서 모이를 줍거나 뜨락을 거닐다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느닷없이 대장닭에게 뒤통수를 쪼여 비명을 지르기가 일쑤이다. 한번은 그중 한 놈이 대장닭 옆에서 목줄띠를 뻗고 기지개를 켜다가 호되게 얻어맞고 나둥그러지기도 했다. 쪽을 못 쓴다는 말이 바로 이것을 두고 생겼거니 싶은 광경이기도 하다. 그러니 수놈 구실을 한답시고 암탉을 넘보기란 더더욱 어림없는 노릇이다. 마치 환관이 임금 앞에서 궁녀를 넘보는 일만큼이나 안 될 궁리인 것이다. 어쩌다가 한 놈이 그것을 시도하다가 울타리 끝 구석빼기까지 쫓겨 달아난 일이 있다. 궁중의 법도였다면 능지처참을 당하고도 남을 죄과이지만, 그만한 정도의 혼띔으로 끝내는 것이 고작이니 자못 우리네 인군人君의 도량보다 크고 넓다 하겠다.
   하기는 대장닭 그도 한때는 그런 수모와 핍박 속에서 성장한 쓰라린 과거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우리 집 울타리 안에서의 계보로 따져 그는 3대째의 대장닭이다. 그는 할아버지 닭의 권좌를 찬탈하여 대장닭이 된 애비 닭의 시하에서 한동안 죽어지내다가, 어느 날 처절한 결투 끝에 애비 닭을 물리치고 마침내 대권을 거머쥐게 된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에게는 친조모이자 바로 어미가 되는 씨암탉까지를 자신의 처첩으로 차지하고 만 것이다. 그러니까 그의 혈통 속에는 오이디푸스적인 숙명의 피가 면면하게 흐르고 있는 셈이다. 어쩌면 권력 그것의 생태가 숙명적으로 오이디푸스의 혈통을 지닌 것인지도 모른다. 즉 그가 지금 누리고 있는 절대 권력의 비참한 종말을 예비하는 것이기도 하다.
   미상불 그 운명의 조짐이 그들의 내부에서 서서히 무르익고 있었다. 요 며칠 새에 부쩍 체구가 우람스러워진 수탉 한 마리의 거동이 심상치 않은 것이다. 여느 때 같으면 고개를 조아리고 물러났어야 할 대장닭의 경고성 도발에도 꿈쩍 않고 버텼다. 눈만 한 번 껌벅하고서 콧방귀를 뀌는 눈치였다. 그것은 마치 머리 큰 자식이 부모의 말을 대수롭잖게 받아넘기는 그런 시건방진 태도 같기도 했다. 힘으로는 당할 수 없는 후레아들의 대거리에는 별수 없이 이쪽에서 강경 자세를 거둬 들일밖에 없는 노릇이다.
   그러던 놈이 이제는 대장닭이 보는 앞에서 암탉들을 마구 덮치기 시작이다. 그럴 때마다 대장닭의 거동을 살펴보면 짐짓 외면이라도 하듯 먼 산만 멀뚱히 바라볼 뿐인 것이다. 그 기죽은 듯한 자태가 웬일인지 처연해 보인다. 그제사 눈에 띈 것이지만, 그의 삽상한 검은 꼬리에 언제 생겼는지도 모를 흰 깃털 한 오리가 도드라져 보였다. 마치 초로에 귀밑머리에 내비친 흰 머리카락과도 같이…….

 

 


   이 수필을 처음 대했던 십수 년 전, 그때 뭉클했던 감동이 기억에 새롭다.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 늙어가는 한 마리 장닭 꼬리에 생긴 흰 깃털뿐이었을까만, 그때 난 지명知命의 문턱을 넘어선 후였다. 꽁지에 흰 깃털을 달고 멀뚱히 먼 산을 바라보는 대장닭의 처연한 모습에서 내가 보였다. 무소부지로 활보해본 기억도 없이 초로에 든 내가.
   그 후 실제로 대장닭을 만나 볼 기회가 있었다. 퇴촌에 사는 한 지인의 집에서였다. 그 집에서는 닭을 방사했다. 집 뒤에 있는 야산까지 천오백여 평이 그들의 놀이터였으니 호사를 누리는 녀석들이었다. 가끔 삵이나 족제비가 그들을 노리기도 해서 ‘벤’이라는 콜리 한 마리도 함께 기르고 있었다. 그 넓은 땅에서 뛰노는 스무남은 마리 닭 중에 유별나게 큰 장닭 한 마리. 훤칠하고 당당한 모습이 박재식 선생님의 수필 속에서 금방 걸어 나온 듯했다.
   그 닭들과 보낸 한나절은 수필 속에 들어앉은 느낌이었다. 어쩌면 닭들의 사는 모양을 그렇게 한 치 한 푼 틀리지 않게 묘사할 수 있었는지 감탄이 나왔다. 오골계 수탉 두 마리는 등의 털이 몽땅 뽑혀 거무죽죽한 맨살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아마도 주제넘은 짓을 했지 싶었다. 대장닭의 발소리에도 찔끔 놀라며 도망치는 모습이라니. 그러나 모이를 주었을 때 대장닭은 그 수탉까지도 빠짐없이 불렀다. 그는 군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베풀고 보듬을 줄도 알았다.
   집주인이 콩알만 한 사료를 손에 놓아주며 닭을 불러보라고 했다. 잽싸게 몇 마리가 덤벼들었다. 손에 올려놓기가 바쁘게 채가는 바람에 손바닥이 따끔따끔했다. 다칠 것 같아 그만하겠다고 했더니 대장닭도 주어보란다. 여느 닭의 서너 배는 되어 보이는 부리에 쪼일까 겁은 났지만 사료 한 알을 손에 놓고 대장닭 쪽으로 내밀었다. 그는 천천히 걸어왔다. 장군처럼 당당하고 왕처럼 오만했다. 그 기세에 하마터면 모이를 떨어뜨릴 뻔했다. 그는 사료를 빤히 쳐다보며 사뿐히 집어 올렸다. 깃털 하나 움직이지 않고 고개도 숙이지 않았다. 손바닥은 미동도 느끼지 않았다. 그때 내 옆에는 송아지만 한 콜리가 엎드려 있었다. 대장닭은 사료를 한 번 집은 후 올 때처럼 당당한 걸음으로 자리를 떴다. 남은 닭들이 모이를 찾아 부산을 떨었다.
   왕관 같은 커다란 볏, 날카롭고 부리부리한 눈, 꼭 다문 다부진 부리는 왕의 풍모였다. 떡 벌어진 가슴팍은 세상을 다 품을 것 같았다. 독수리 같이 억센 발목과 날카로운 발톱에서 벗어날 것은 없을 것 같았다. ≪장자≫의 달생達生편에 나오는 ‘목계지덕木鷄之德’이 생각났다. 목계는 기성자가 조련한 투계鬪鷄의 마지막 단계다. 상대편이 아무리 소리치고 위협해도 반응하지 않으며, 마치 나무로 조각한 닭과 같아서 다른 닭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제압하는 위엄 있는 닭이었다. 바로 그 대장닭의 모습이 아닌가. 장자가 덕을 이야기하면서 하필 투계를 들어 이야기한 까닭을 알 것 같았다.
   박재식 선생님은 닭의 이런 모습에서 일찍이 장부다운 기개와 도량과 책임감을 보았고 믿음직한 지도자상을 읽어낸 것이다. 사람의 지도자도 그런 덕을 갖추어주기를 바란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 대장닭만큼 덕을 갖춘 지도자가 얼른 떠오르지 않는 것이 아쉬웠다.
   그 대장닭도 때가 되면 물러가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꼬리에 도드라진 흰 깃털은 물러날 때를 말하지 않는가. 동물들의 질서는 장유유서가 아니다. 아비를 내치는 후레아들도 아니다. 제 종족을 거느려야 할 사명을 짊어진 새로운 강자의 탄생일 뿐이다. 열매가 꽃을 밀어내는 것과 다름없는 자연의 이치. 그러나 그것이 사람의 일일 때 자연의 이치라고만 할 수 있을까.
   우리에겐 예부터 장유유서의 질서가 있었고 효친, 경로의 풍습이 있었다. 권좌에서 물러난 노인을 구석빼기로 몰아내는 것이 아니었다. 옛날 어른들은 기침 소리, 지팡이 소리, 담뱃대 두들기는 소리만으로도 집안을 다스렸다. 강약의 질서로는 한 주먹에도 차지 않을 허리 굽은 노인이 그 자리에 계시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었다. 그런데 세상이 자꾸만 흔들린다.
   조폭의 세계에서는 힘센 자가 ‘형님’이라 불린다. 모이 하나 쪼는 데도 순서가 유별한 패킹 오더(pecking order)는 동물세계의 질서다. 강약유서, 그 강자의 질서가 요즘에는 조폭의 세계에서만 통하는 것이 아니다. 권력을 잡기 위한 권모술수야 필요악으로 묵인되던 시대도 있었다. 어차피 권력은 배신이란 자식을 잉태하고 있는 것이 아니던가. 그러나 재산이 욕심나서, 도박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훈계하는 부모가 못마땅해 목줄띠를 세우고 덤벼 부모를 살해한 수탉들의 소식에는 나도 모르게 눈을 감게 된다. 닭 같은, 아니 닭보다 못한……. 그런데 그런 패륜아를 닭에 비교한다고 대장닭이 그 큰 부리로 나를 사정없이 쪼아대지나 않을는지.
   ‘대장닭’ 속에는 이런 동물의 질서에 편입하려는 강자에게 내리는 꾸지람이 들어있다. 은근하면서도 호되기가 서릿발이다. 그러나 자연의 질서를 어찌 못하는 그의 일갈에서 페이소스를 느낀다.
   그런데 요즘 아주 흥미로운 대장닭의 이야기가 있다. 감히 대장닭이라 불러도 좋을지 모르지만, 그는 수천억 개의 모이를 감추어놓고도 스물아홉 개밖에 없다고 닭발 아닌 오리발을 내밀던 장닭이었다. 뭇닭들의 비난도 외면한 그에게는 흰 깃털 같은 것은 영원히 돋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런 그의 둥지에 며칠 전 느닷없는 침입자가 있었다. 응당 뒤통수를 쪼아 구석빼기로 쫓아내야 하는데 “수고 많다. 닭들에게 면목이 없다.”라는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늘 빛나기만 하던 그의 머리에 흰 깃털 한 오리가 난 것일까. 어쩌면 그의 때늦은 흰 깃털을 보며 짠한 생각에 가슴 뭉클해지는 것은 아닐는지…….

 

 

 

김이경  ----------------------------------------
   ≪수필과비평≫ 등단. 제물포수필문학회 이사. 수필과비평 이사. 수필과비평작가회의 인천지역장. 출향목포문인회 부회장. 경기수필문학회 회원. 인천수필시대・경인문학회・한국문인협회 회원. 2005년 교원문학상 수상. 제6회 황진이상 수필부문 본상 수상. 수필집: ≪멍텅구리 의자≫, ≪휘파람을 부세요≫, ≪가끔씩은 흔들리지 않아 보는 거야≫, ≪숨비소리≫ 외 다수 공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