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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 2013년 8월호, 다시 읽는 좋은수필] 꿈 - 유경환

신아미디어 2013. 10. 17. 09:45

"“할아버지 장난감은 사 뒀다가 인편으로 보내드려요.” 내겐 그것이 움직이는 동화 같은 꿈이었건만, 열 살짜리에겐 장난감에 불과했나 보다. 가끔 꿈속에서 새가 노래하는 시계 소리를 듣고 잠을 깬다. 그런 날에는 다시 잠을 청하지 않고 쓰다 만 동화를 쓴다. 새벽 다섯 시쯤 되면 다섯 시에 우는 새 소리는 어떤 소리일까 하고 뜨락을 서성이다 뒷산으로 올라간다. 낯모르는 인편이 와서 문을 두드릴 것 같은 기다림도 그런 날에는 다시 새로워진다."

 

 

 

 

 

 꿈     /  유경환

 

   미국 사람들은 지퍼가 달린 동전 주머니를 지니고 다닌다. 작은 구리 동전 페니도 꼭 내주며 꼬박꼬박 받아가곤 한다. 이렇게 일전짜리를 소중히 여기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곤 하였다.
   평소 우리 돈 1원짜리는 고사하고 10원짜리 동전까지 시들하게 여겨온 나로서는 한참씩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동전의 가치를 하찮게 생각했던 내 버릇은 미국 돈 다임이나 쿼터까지 하찮게 여기도록 미국 땅에서도 연장되어, 끝내 이십여 일간의 이번 체류에서 모처럼 품었던 꿈 하나를 놓치고 만다.
   정년퇴직 뒤에 가장 반가웠던 기별은 강의를 맡으라는 모교의 제의였다. 학과장으로부터 확정 통보를 받자마자 오리건 대학엘 다녀올 채비를 차렸다. 새로 맡게 된 강의에 대해 ‘이왕이면….’ 하는 욕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 대학에는 딸과 사위가 있다. 이들에게서 대학 도서관 시설과 장서 그리고 언론학에 관한 최신 정보와 참고 서적이 어느 정도인가를 익히 들어왔기에 내 강의 교안 작성 자료 수집에 교환교수라는 그들의 지위를 활용할 계획이었다.
   이번에는 그전과 달리 집사람을 데리고 갔다. 가서 해주는 밥을 먹으며 도서관엘 들락거렸다. 그렇다고 이십여 일을 아침부터 저녁까지 학생 시절처럼 보낸 것은 아니다.
   하루에 한 줌씩 거스름으로 받는 동전이 모아졌다. 주머니에 불룩하게 넣고 다닐 수도 없어 바지를 벗을 때마다 플라스틱 접시에 쏟아놓곤 하였다. 나갈 때에 달러 당 1천4백 원으로 환전하였으니, 다임이면 1백40원이고 쿼터면 3백50원이 되건만, 어쩐 일인지 푼돈으로만 여겨져 푸대접을 한 것이다.
   도서 목록을 챙기고 복사할 양을 계산하고 두 주일 안에 일을 마칠 일정을 잡고 난 첫 주말이었다. 텔레비전에서 내 귀와 눈을 잡아끄는 상품이 소개되었다.
   그것은 둥근 벽시계다. 그냥 벽시계가 아니라 때맞춰 열두 가지 새들이 노래하는 새 상품 시계다. 시계판에 숫자는 한 자도 없다. 그 대신 숫자 자리마다에 새들이 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뻐꾹 시계와 다른 것은 시간에 따라 새 울음소리가 다르며, 또 자연음에 가까운 녹음 소리가 난다는 것이다. 값은 19달러 99센트.
   ‘저것을 하나 사 가지고 가야지…….’
   동화 같은 매력이 내 구미를 당겼다. 그리고 그날 이후 내 꿈의 일부가 되었다.
   마침내 다음 주말, 딸네 계획까지 변경시켜 가며 쇼핑몰에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 아이들이 차를 모는데 근교이리라는 생각과 달리 고속도로로 오르는 것이 아닌가. 이십여 년 전의 내 경험은 이미 아득한 옛날 일이었다.
   한 시간이나 달려서 겨우 닿았다. 이제는 다 아는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쇼핑몰의 내부 시설과 다양한 진열은 능히 사람의 혼을 빼놓을 만큼 요란하다. 나나 집사람이나 어느새 빠져나간 제정신을 되찾는 데 서너 시간이 걸렸다.
   딸애는 늘어난 식구가 묵을 기간분의 식품을, 사위는 철 지나 값 내린 옷가지를, 그리고 열 살짜리 외손자는 전자게임기를 적어 가지고 온 목록대로 살피러 다니느라 진이 빠질 만큼 돌아다녔다. 이집 물건보다는 저집 물건의 질이 좋고, 저집 물건보다는 이쪽 집의 것이 값싸고 하면서 뱅뱅 도는데 서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아버님은 꼭 사셔야 할 것 없으세요?”
   간이식당에서 시장기를 채우고 나자 사위가 입을 열었다. 벽시계 이야기를 꺼낼까 말까 망설이는데 집사람이 눈치를 채고 얼른 가로막고 나섰다.
   “으음, 별로…….”
   “우리도 한 바퀴 돌아봅시다.”
   텔레비전 광고를 기억해내서 겨우 노래하는 새 시계 파는 곳을 찾아냈다. 그러나 지갑을 꺼내 지폐를 세어보니 몇 달러가 모자랐다. 접시에 부어 둔 동전을 가지고 왔던들 하고 후회했지만 무슨 소용이랴. 아쉽고 안타까웠다. 말이 잘 안 통해서 지체되는 줄 알았던지 외손자가 우리를 찾아와 도와주겠다는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시치미를 떼고 다음 주말에 다시 오자고 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외손자는 제 어미에게 귓속말을 했다.
   “외할아버지가 몇 살이에요?”
   또 주말이 가까워오자 복사 자료 부치는 일을 서둘렀건만, 사위는 ‘모처럼 오셨는데 백두산 천지보다 더 높고 큰 호수가 산 위에 있는 곳엘 가보자.’고 제의했다.
   결국 새가 노래하는 벽시계를 파는 쇼핑몰에는 다시 갈 기회를 얻지 못했다. 떠나는 날 외손자는 공항에서 제 에미에게 귓속말을 또 했다.
   “할아버지 장난감은 사 뒀다가 인편으로 보내드려요.”
   내겐 그것이 움직이는 동화 같은 꿈이었건만, 열 살짜리에겐 장난감에 불과했나 보다. 가끔 꿈속에서 새가 노래하는 시계 소리를 듣고 잠을 깬다. 그런 날에는 다시 잠을 청하지 않고 쓰다 만 동화를 쓴다. 새벽 다섯 시쯤 되면 다섯 시에 우는 새 소리는 어떤 소리일까 하고 뜨락을 서성이다 뒷산으로 올라간다. 낯모르는 인편이 와서 문을 두드릴 것 같은 기다림도 그런 날에는 다시 새로워진다.

 

 

유경환  -------------------------------------------

   유경환님은 황해도 장연 출생(1936년~ 2007년), 연세대학교 대학원 언론학 박사, 아동문학가, 시인, 언론인.  195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시 입선, 저서 《원미동 시집》, 《산노을》, 《꽃사슴》, 《나무호미》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