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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비평 2013년 8월호, 사색의 창] 꼬마머슴 생각 - 김원

신아미디어 2013. 10. 2. 08:24

"서당은 문화재로 다시 태어나 번듯하게 보존되고 있고 초가집은 새마을 사업으로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세월이 가면서 사람들은 가슴 아팠던 과거를 잊고 살려고 할지 모르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그리움만은 지울 수가 없는 것 같다. 나는 오늘 따라 그 꼬마머슴이 한없이 그립다."

 

 

 

 

 

 

 꼬마머슴 생각    김원


   내가 대학에서 은퇴하고 고향에 머물던 어느 해 가을이었다. 하루는 검은 정장을 한 젊은이 몇이 까만 승용차에서 내려 우리 집으로 걸어 왔다. 차가 골목길 대문으로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내가 고향에 머물고 있는 것을 아는 제자나 아니면 나를 아는 손님이 서울서 찾아온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곧장 우리 집 관리인 방으로 들어갔다. 내 손님으로 생각했다가 허탕을 치고 나서 기분이 좀 썰렁했지만 나는 어색한 모습을 감추고 곧바로 서재로 들어가 내 할 일에 매달렸다. 그리고 이내 잊어버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누군가가 밖에서 나를 찾는 소리가 났다. 대청 서재 문을 열고 보니 우리 집 관리인이 오전에 본 그 젊은이들과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관리인은 그 청년들을 나에게 인사를 시킨다. 그는 좀 계면쩍은 눈치로 “대일 형님의 아들입니다.”라고 한다. 나는 대일이가 누구더라? 하고 잠시 생각을 머뭇거렸지만 이내 내 나름대로 희미한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래 맞아. 네 형 이름이 대일이었지.” 하는 순간 대일에 대한 기억이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6·25전쟁이 끝나고 나서 우리 동네는 가뭄과 기근으로 살기가 어려웠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흉년이 찾아왔다. 사람들은 살기에 안간힘을 썼지만 흉년 앞에 장사가 없다. 유일한 탈출구가 식구 숟가락을 줄이는 것이다. 대일의 부모도 예외가 아니었다. 큰누나는 우리 작은할아버지 집에 식모로, 그리고 대일은 우리 집 꼬마머슴으로 들어왔다. 대일은 삼형제 중 맏이다. 어린 두 동생을 두고 그가 먼저 내몰렸다. 가난의 희생물인 대일은 초등학교도 마치지 못하고 어린 십대의 나이로 우리 집 식구가 되었다. 얼마 되지 않는 사경을 선불로 받아 집에 가져다주고 큰머슴을 도와 잦은 일을 해야 했다. 바쁠 때 농사를 돕고, 한가할 때는 꼴을 해 소죽을 끓이고 가까운 산에 가서 나무를 해 오는 것이다. 그와 나는 그렇게 끈질긴 인연이 맺어졌다.
   둥글넓적한 얼굴에 약간 수줍어하는 대일은 고집이 셌다. 웃는 법이 없고 충직스러우리만치 고지식하고 자존심이 강해 보였다. 그것이 열등감 때문인지는 몰라도 마음씨 하나만은 착하고 고왔다. 그와의 나이 차이는 내가 십여 년 위인 듯했다. 휴전이 되고 나는 이미 고3에 들어가 대입시를 준비해야 했는데 그와 가까워진 것은 그 무렵이었다. 시내에 살던 나는 겨울방학에 시골로 와 집 옆 서당 방을 몇 달간을 쓰게 되었는데 그때 그는 내 공부방에 군불을 따끈하게 지펴 주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는 가녀린 체구에 지게를 지고 가까운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해 와 내 방을 따뜻하게 해 주었다. 내 방은 그렇게 하루도 빠짐없이 따뜻했다. 그때만 해도 휴전 직후라 전통적인 반상간의식이 서서히 붕괴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고 나를 깍듯이 대했고 나 역시 그런 봉건적 관습을 떠나 그를 남달리 여기고 고마워했다.
   그리고 나는 서울로 올라갔고 여러 해가 흘렀다. 대학을 졸업하고 군을 마친 나는 대학원에 진학하기 위해 또다시 고향에 내려와서 시험준비를 해야 했다. 이번에는 집에서 조금 떨어진 외딴 초가집 갓방을 빌렸다. 방바닥에 멍석을 깔아 놓고 거미줄을 걷어내고 청소를 하고 나니 쓸 만했다. 대일은 이미 중머슴으로 성장을 해서 우리 집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몫을 해내고 있었다. 그와의 두 번째 만남은 그렇게 이어졌다.
   3·15부정선거와 4·19학생혁명이 일어나 나라 안은 어수선했다. 나는 미국 유학의 꿈을 이루기 위해 대학원엘 가야 했다. 동지섣달 밤은 길고 추웠다. 문풍지가 울어 대는 긴 밤에 이불을 덮어쓴 채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버티는 것은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호롱불 밑에서 밤을 새며 하루하루를 이어갔다. 그렇게 진학의 열기는 높아 갔다. 대일은 중머슴이 되어서도 조금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고 추운 날씨에도 장작을 패서 지게에 지고 초가집 내 공부방으로 와서 군불을 지펴 주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의 정성 어린 도움이 없었더라면 내가 어찌 대학원엘 가고 미국 유학을 갈 수가 있었을까. 그 고마움을 잊을 수가 없다.
   그와의 긴 헤어짐은 그 후부터다. 그를 잊고 지난 지 반세기가 더 넘었다. 대학에서 정년을 하고 고향에 돌아와서야 옛날 꼬마머슴 생각이 났다. 그는 1970년대 군대를 마치고 조국근대화의 물결을 타고 고단했던 머슴의 자리에서 벗어나 도시 공장으로 자리를 옮겨 트럭운전사로 안정된 생활을 했다. 결혼도 하고 아들 둘을 두어 행복한 40대를 보냈다. 그러나 그 고집 때문인지 술을 달고 다니다 아까운 40대에 그만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잘은 몰라도 그의 고집불통 성격 때문인 듯하다. 남은 식구들은 어려웠지만 아들 둘은 착하게 성장을 해주었다.
   오늘 우리 집에 찾아온 청년들은 바로 그 꼬마머슴 대일의 아들들이다. 젊은이들은 막내삼촌인 우리 집 관리인과 함께 그의 아버지 산소에 성묘하러 왔던 것이다.
   ‘그래, 너희들이 바로 대일의 아들들이구나.’ 나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한동안 말문을 열지 못했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몰랐다. 꼬마머슴이 환생하여 나타난 것일까. 젊은 청년들은 모두 잘생겼고 준수해 보였다. 애비보다 월등히 잘생겼다. 한 세대를 내려가며 그들은 꼬마머슴 아들에서 의젓한 도시인으로 성장했다. 그의 아버지가 우리 집 새끼머슴이었다는 가려진 비애와 그가 겪었던 고통과 족쇄를 뛰어넘어 어두운 그림자를 지우고 그들은 이젠 훌륭한 도시인이 되었다.
   나는 가슴이 벅차올라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가 내 공부방을 따뜻하게 데워 주지 않았다면 오늘의 내가 어찌 있을 수 있을까. 나는 애써 속내를 감추면서 대청마루에서 내려가 두 아들의 손을 잡았다. 따뜻한 체온이 느껴 왔다. 꼬마머슴의 어릴 적 모습이 떠오르고 그가 데워 주었던 서당 방과 초가집 갓방의 따뜻한 아랫목이 겹쳐 왔다. 서당은 문화재로 다시 태어나 번듯하게 보존되고 있고 초가집은 새마을 사업으로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세월이 가면서 사람들은 가슴 아팠던 과거를 잊고 살려고 할지 모르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그리움만은 지울 수가 없는 것 같다. 나는 오늘 따라 그 꼬마머슴이 한없이 그립다.

 

 

김원  --------------------------------------------
   월간 ≪수필문학≫으로 등단. 제18회 수필문학상 수상. 수필집 ≪진짜 칼국시 교수가 되려면≫, ≪공자와 예수가 바둑을 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