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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비평 2013년 8월호, 작품론] 내재적 선택으로 삶의 의미 찾기: 이현수 수필집 ≪당신의 뒷모습≫ - 강돈묵

신아미디어 2013. 9. 29. 18:18

"매일 매일 일상생활에 만족을 느끼고 그것의 의미를 찾는 내재적 선택의 길을 걷고 있다. 이러한 것은 작가가 자신의 삶을 긍정적 시각으로 받아들이는 수용자세가 있기에 가능하다. 내재적 선택의 길은 수필집 전편에 걸쳐서 있다. 작가 자신을 성찰하는 데에도 있고, 가족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도 있고, 사회를 읽는 데에도 있으며, 시간의 흐름 속에도 있다. 그래서 매번 작가는 자신의 삶에서 반성과 후회를 통한 자아 성찰을 거쳐 재창조의 길을 걷게 된다."

 

 

 


 내재적 선택으로 삶의 의미 찾기     -  강돈묵
    - 이현수 수필집 ≪당신의 뒷모습≫

 

 


1. 들어가면서


   사이먼 블랙번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라는 글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방법을 ‘초월적 선택’과 ‘내재적 선택’으로 구분하였다.
   ‘초월적 선택’은 이 세계의 사소하고 초라하고 우연적이고 유한하고 동물적인 본성을 초월하려는 것, 즉 현재의 삶에서 느끼는 혼란과 슬픔, 현실의 광적인 모습과 사건으로부터 벗어나 다른 세계, 다른 존재방식에 희망을 품으려는 것을 말하고. ‘내재적 선택’은 이와 반대로 삶 자체에서 의미를 찾는 것을 일컫는다.
   ‘내재적 선택’을 다시 말하면 매일 매일 일상생활에 만족을 느낀다고 보고 그 의미를 찾는 방법이다. 사람들의 삶은 비록 단조롭게 반복되지만 그래도 인간 존재에게는 살아야 할 충분한 의미가 있다고 보는 견해다. 내재적 선택에서 보면 아침에 눈을 뜨면서 저녁에 잠자리에 들기까지 우리의 곁을 스쳐 지나가는 모든 것들이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고 보는 것이다. 내가 직접 경험한 것은 물론 남의 경험까지도 내게 삶의 의미를 안겨준다고 보고 있다. 다른 이보다 앞서가는 경우에는 성취감을 느낄 수 있지만, 남들의 뒤에서 가는 꼴찌에게도 의미가 있다. 다만 그 과정 자체에서 소중한 가치와 의미를 찾는다. 삶에는 유일한 의미가 아니라 매우 다양한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작가 이현수에 있어서 삶의 의미를 찾는 방법 역시 내재적 선택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현실의 삶에 염증을 느끼고, 그곳에서 이탈하려는 몸부림이라기보다는 현실의 삶에 만족하면서 그 안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시각을 견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 이현수의 작품세계에서는 허구를 찾을 수가 없다. 수필의 본 영역에서 조금치도 이탈을 꿈꾸지 않는다. 오로지 현실에서 이탈하지 않고, 그 안에 안주하며 나름의 의미 찾기에 나서고 있다. 현실 이상의 초월적 세계에 대한 동경도 없고, 오로지 대상들의 조용한 삶을 묘사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그의 작품세계가 요란하지 않고 언제나 조용하며 차분한 것은 ‘지금 여기’가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현실에 만족하면서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니, 파도와 같은 격랑이 일어날 리도 만무하고, 언제나 사건과 현상에 깊이 침잠하여 의미를 찾아내는 수고를 하게 되는 것이다.
   작가에게 있어서 삶의 의미 찾기 방법이 내재적 선택에 의존하고 있음은 그의 수필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때때로 나는 장미나 포도, 전나무처럼 내가 가진 행복의 요소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남들이 지닌 것들만 부러워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자답하곤 한다.
   누가 말했던가. 불행은 비교하는 데서 싹튼다고. 나보다 출세하고 나보다 월등히 잘사는 사람들과 비교하다 보면 열등감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절대적 빈곤보다 상대적 빈곤이 무섭다고 한다. A학점을 받고도 불만에 싸여 있는 건 A학점을 받은 사람이 나 말고도 많기 때문이란다. 그러면 모두 잘못했으니 나도 C학점을 받은 것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말인가.
   행복은 만족하는 데 있다고 하니 민들레처럼 내가 서 있는 자리를 살피고, 내 삶에 충실해야 할 일이다. 거기에 나만의 행복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만족과 감사를 모른다면 천금이 있은들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에서

 

   뿐만 아니라 초월적 선택에 대해서는 매우 조심스럽게 경계하고 있다. 현실을 뛰어 넘는 꿈에 대해서도 한 계단 한 계단 올라서는 단계를 더 중요시하고 있는 것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수필 <꿈이 이루어질 때>를 보면, 허황된 꿈을 꾸지 않고, 작가가 얼마나 현실을 토대로 사고하고 있는지를 어렵지 않게 간파하게 된다.

 

   꿈을 무작정 크게 꾸다가 스스로 좌초하는 수도 있다. 그것은 그 꿈이 과하거나 부적절하거나 조화를 상실했을 때이다. 너무 큰 것, 너무 허황된 것, 그리고 이치에 부당하거나 선한 뜻에 기초하지 않은 것은 스스로 무너지게 마련이다. 초등학교에서 중학교에, 중학교에서 고등학교에 진학하듯이 꿈은 점진적이어야 한다.

-<꿈이 이루어질 때>에서

 

   수필이 작가의 삶의 표현임에서 벗어나지 않기에 작가의 삶은 바로 그의 작품세계가 되기 마련이다. 더러는 자신이 걸어온 세계와 정반대로 표출되기도 하지만, 대개의 경우 수필은 자신이 걸어온 길을 따라 전개되기 마련이다. 그 길을 역주행하는 경우도 드물다. 그렇다고 상상마저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작품의 효과를 노리기 위해 얼마든지 상상의 옷을 입힐 수도 있다. 그래서 수필도 문학이다.
   이현수의 ≪당신의 뒷모습≫의 경우 관심의 초점을 네 가지로 구분하여 생각해 본다. 그것은 작가가 이 세상에 태어나 숨 탄 후의 여정에 따라 확연히 드러난다. 왜냐하면 작가 자신을 표현해야 한다는 수필이 갖고 있는 숙명 때문이다. 인생을 살면서 끝없이 계속된 자아에 대한 성찰에서 얻어진 의미(자아성찰)와 태어나 가정 안에서 성장하면서 얻게 되는 의미(가정 내지 가족에 대한 시각)와 이 세상에 발을 깊이 담그고 호흡하면서 얻게 되는 의미(사회에 대한 시각), 그리고 자신이 글을 쓰면서 관심을 갖게 된 분야에서 얻은 의미(관심거리에 대한 시각) 등으로 나타난다.
   이현수 작가에게 있어서 전술한 네 가지 중 앞의 세 가지는 자신이 처한 현실에서, 외부로부터 얻게 되는 의미라고 볼 수 있다면 마지막 하나는 작가의 관심이 어디에 있느냐에 대한 고백이다. 이현수 작가에게서는 ‘지금’이라고 하는 시간적 개념에 남다른 관심이 큼을 읽을 수 있다. 수필이 현실과 동떨어져서 이루어질 수 없고, 내재적 선택이 ‘지금 여기’에 초미의 관심을 모은다는 점을 고려할 때 당연한 결과라 하겠다. 그래서 지금 작가 이현수는 지금을 살면서 과거와 비교하는 입장을 늘 견지하고 있게 된다. 삶의 매 순간은 과정이면서도 목표인 것이기에 작가 이현수는 영원한 지금에 서서 매 순간 반성하고 후회하면서 그 후회를 발판으로 자신의 삶을 재창조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2. 작가의 눈에 비친 삶의 의미


   가. 후회의 눈빛-자아 성찰
   덴마크의 실존철학자 키르케고르가 일찍이 ‘인간은 어차피 후회하는 불행한 존재’라고 말했듯이 늘 후회하며 살아내야 하는 것이 삶인지도 모를 일이다.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면서 좀 더 잘했더라면 하고 후회도 하게 된다. 더러는 아침에 후회하고, 점심에 후회하고, 저녁에도 후회한다. 이 후회는 개중에는 희망을 향한 원동력이 되는 것도 있다. 자기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후회와 반성을 토대로 개선의 길을 걷게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발전의 모드를 찾을 수도 있다.
   인간의 삶은 습관화되고 일상화되면 의식하지 못하고 스쳐 지나간다. 그래서 예술에서는 시각의 새로움을 위해 ‘낯설게 하기’를 요구하기도 한다. 우리의 삶은 알게 모르게 지나치게 되어 있다. 이 ‘지나침’이 바로 일상생활의 특징이기도 하다. 이 지나침은 우리가 의식하였든 의식하지 못하였든 별 뜻 없이 반복된다. 그리고 종국에는 우리의 삶이 모두 ‘지나침’으로 가득 채워지게 된다.
   여기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인간은 지난 세월에 대한 반성과 후회를 하게 된다. 인간은 문득 깨달은 자신의 무의미한 현실에 불안을 느끼게 되고 이어서 반성과 후회가 따르게 된다. 이 후회는 대개의 경우 나와 남을 비교하는 데서 비롯한다.
   이 후회의 힘은 초월적 선택에서 이루어지면 엉뚱한 공상에 빠지게도 하지만, 내재적 선택으로 잘만 관리되면 자아성찰로 이어져서 나아가 자기 계발로 전환될 수도 있다.
작가 이현수에 있어서 후회는 철저하게 내재적 선택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으레 자아성찰로 이어져서 자기 계발로 전환되고 있다.

 

   한나절 손품을 들여 겨우 작업을 끝내고 나니 마음이 개운하다. 나는 여태 난의 외모만을 보아 왔지 뿌리에는 전혀 관심을 주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리 수려한 용모를 가진 품종이라도 뿌리가 실하지 못하면 결코 건강하게 자랄 수 없다는 평범한 이치를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략)……
   오늘날 밖으로 드러난 외양이나 겉치장만 중시하고, 드러나지 않는 이면세계의 참모습을 경시하는 풍조는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잠시 잠깐 유행하다 사라지는 사회적 풍조에 휩쓸려 인간의 진정한 가치와 온전한 삶의 진실을 외면하는 어리석음이 더 이상 범람해서는 안 될 것이다.
   뿌리가 썩어가는 줄도 모르고 꽃필 날만 기다리고 있다가 하마터면 난초를 송두리째 죽일 뻔하였다.

-<겉과 속>에서

 

   난의 겉모습에만 관심이 미쳐 속이 썩어 들어감을 알지 못했던 경험을 기술하고 있다. 작가는 글감으로 아주 특이한 것을 들고 나오지 않는다. 일상의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함이다. 휴머니즘의 문학인 수필에는 아주 적절한 자세이다. 그래서 수필가는 아주 적은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이러한 것은 자신의 일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내재적 선택으로 삶의 의미를 찾기에 가능한 일이다.

 

   터널 속 같은 산죽 숲길도 좋거니와 도토리나무와 상수리나무가 울창한 숲 사이사이에 자라고 있는 차나무를 스쳐 지나는 비탈길은 더욱 좋다. 산등성이에 이르면 마치 보료를 깔아 놓은 듯 탄력 있는 소나무 숲길 또한 상쾌하다.
   산에는 생명의 조화와 섭리가 있다. 큰 나무 줄기에 넝쿨나무가 의지하여 살고, 소나무 그늘에서 자란 춘란은 새싹을 틔운다. 여기저기 산새들이 제 목소리를 뽐내며 짝을 부르고, 벌 나비들은 꽃을 찾아 부지런히 날아다닌다.
   지난주에 갔던 지리산 노고단의 장중한 경관과 달궁계곡의 맑은 물과 공기도 좋았지만, 이 어등산의 아기자기한 초목의 아름다움도 그에 못지않다. 산행을 하는 데 꼭 고산준령이나 명산만 찾을 필요가 있으랴. 명산은 명산대로 좋지만, 이름 없는 야산이라도 그 나름의 묘미가 있어서 좋다.

-<산빛은 시간 따라>에서

 

   작가의 삶의 태도가 여실히 드러난 글이다. 작가 이현수는 남보란 듯이 찬란한 삶을 요구하지 않는다. 일상의 삶에서 의미를 찾는 태도가 산행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호화롭고 우람한 것만이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아주 미미한 것이라도 제 나름 존재의 의미가 있다. 그래서 작가 이현수는 도토리나무, 상수리나무, 차나무, 소나무에 존재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에서 조화와 섭리를 찾아낸다. 큰 나무 줄기를 기어오르는 넝쿨식물에도 의미를 부여한다. 소나무 밑에 자라고 있는 춘란은 물론 산새, 벌 나비, 물과 공기와 같은 아주 평범한 글감에서 의미 찾기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얻은 것은 고산준령과 명산만이 산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찬란한 삶만이 가치 있는 것이 아니고, 아주 미미한 존재라도 나름은 존재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철저한 내재적 선택에 의한 의미 부여이다.

 

   나. 사랑의 눈빛-내리사랑
   가정을 가지고 있는 작가라면 가족 구성원에 대한 관심을 감출 수가 없다. 그리고 이것은 굳이 감출 일도 아니고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다만 자녀들에 대한 생각이 불만으로 꽉 차서 현재보다 나은 모습을 동경하고 선망한다면 초월적 선택을 꿈꿀지도 모른다. 하지만 작가 이현수에게 있어서는 언제나 현재의 삶에 만족하면서 내재적 선택을 통해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더러 과거 자신이 자녀들에게 아쉬움을 느껴서 다그쳤던 점을 후회하는 장면이 나오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삶의 과정이 후회와 좌절과 절망으로 점철되는 한 단면으로 봐야 할 것이지, 굳이 초월적 선택으로 가름할 일은 아니라고 보아진다.
   그러면 작가 이현수에 있어서 자녀들을 바라보는 시각이 어떠한지 살펴보자. 굳이 수필의 형식에 매이지 않아도 좋을 아들에게 보낸 편지를 살펴보자. 그동안 살아오면서 몸에 배었던 아버지, 남자 또는 가장으로서의 권위와 체면을 모두 내려놓고 현재의 아들을 향해 글을 쓰고 있는 작가에게서는 아쉬움보다는 진지한 후회와 반성으로 채워져 있다. 이 또한 현실에 불만이 가득하여 종교나 초월적 존재에 의지했다면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나는 너희들이 찬휘와 건휘를 잘 양육하는 걸 보면서 내가 너희들에게 행했던 교육방식을 반성하곤 한다. 다정한 친구 같은 아빠, 엄마, 아이들의 요구를 가능한 한 수용해 주려는 이해와 포용력, 시행착오를 자각할 때까지 참고 기다려주는 인내력.
   나는 자식들에게 좀 더 다정스럽고 친근한 아버지가 되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중략)……
   나도 아들에게 표현하고 싶은 따뜻한 말, 때때로 솟구치는 애정과 감격이 왜 없었겠느냐만 그걸 곧이곧대로 드러내놓지 못했다. 나도 모르게 억누르는 것이다. 해 놓고 보면 언제나 충고요 채찍이요 교훈 일색이라는 걸 내 스스로 인정하면서도 고치기가 어렵구나.

-<사랑하는 아들에게>에서

 

   아버지의 입장에서 아들에게 지난 세월에 대한 반성문에 가까운 편지는 우리의 심금을 울린다. 여간하여서는 내놓기 어려운 이야기를 기꺼이 꺼내고 있다. 우선 작가가 자신에 대한 것이든 자녀들에 대한 것이든 만족하고 있음이 이 글의 기저에 깔려 있다. 만족에서 꺼내기에 갈등이 없이 반성과 후회를 거쳐 자기 계발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로서의 권위와 체면을 모두 내려놓고, 자식 앞에 반성문을 쓰는 작가는 미안함의 표현에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아들의 육아법을 지켜보며 자신의 시행착오를 인정하고 아들의 교육법에 찬사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자그마한 변명이 오히려 우리를 따뜻하게 해 준다. 아들에게 표현하고 싶었던 따뜻한 말, 때로는 솟구치는 애정과 감격이 있었는데도 참아야 했음에 대한 고백은 따뜻한 부정을 느끼게 해 준다. 역시 삶의 의미를 커다랗고 큰 것에 두지 않고 아주 일상생활에서 찾아 부여하고 있는 작가의 태도가 겉으로 드러난 좋은 예이다.

 

   그러나 그 애는 6년이라는 긴 세월을 우회하여 이제 한의원을 운영하고 있다. 그가 지난날 배웠던 공학지식이 한의학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전혀 별개의 학문세계가 의외로 상호보족의 연관관계로 이어질 수도 있으려니 싶기도 하다.
   공학도로서보다 한의학도로서 더 큰 보람과 행복을 느끼며 사는 것을 보니, 한편 그의 용기와 고집이 부러우면서 내가 주장하였던 것은 낡은 가치관의 소산이었구나 하고 반성이 된다. 그리고 한 길로만 살아온 것을 축복으로만 생각했던 나의 삶이 오히려 단조롭게까지 느껴지기도 한다.

-<우회迂廻>에서

 

   역시 아들에 대한 이야기다. 기계공학을 전공하던 아들이 박사과정을 중단하고 새롭게 한의학을 하겠다고 나섰을 때의 당혹스러웠던 상황을 기술하고 있다. 아버지의 생각으로는 아들이 한 우물을 파지 못하고 방황하는 모습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은 한의사가 되어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꾸리는 아들을 바라보면서 격렬하게 반대했던 과거의 일을 회상한다. 여기서도 반성은 빠지지 않는다. 한길로만 살아온 자신이 축복받은 것으로 여겼으나 이제는 단조로웠다고 느끼게 된다.
   작가는 끝없는 반성을 이어간다. 작가 이현수에 있어서 반성과 후회는 새로운 길로의 변환 지점에 위치한다. 인간은 ‘영원한 지금’에 서서 매 순간을 후회하고 그 후회를 발판으로 살아간다. 그리하여 그 선택은 자기 계발로 전환하게 된다.


   다. 긍정의 눈빛-사회적 소망
   모든 일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내재적 선택에서는 ‘지금 여기’에 초점이 맞춰지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과거와 미래를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언제나 지금 현재를 산다. 과거와 미래는 현재라는 순간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나 작가가 대상들의 조용한 삶을 받아들이는 수용자세가 어떠하냐에 따라 그 결과는 현저한 차이를 나타낸다. 사회에 대해 늘 불만을 가지고 있는 작가라면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초월적 선택을 선호할 것이고, 사회에 대해 만족하고 있는 작가라면 내재적 선택을 선호할 것이다.
   작가 이현수가 사회를 바라보고 있는 시각은 지극히 긍정적이고 원만하다. 모든 것에 대해 바라보는 시각이 정확하고 그 위에서 자그마한 소망을 내보이기도 한다. 대개의 경우 긍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자에게는 밝고 아름다운 모습만이 보이고, 부정적인 시각의 소유자에게는 어두운 면만이 보이는 법이다. 분명 작가 이현수 앞에도 어두운 그늘이 보였을 텐데, 전혀 그의 시각에는 잡히지 않는 것이다.

 

   얼마 전 나라를 슬픔에 잠기게 한 김수환 추기경의 서거는 그의 아름다운 뒷모습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었다. 그러한 뒷모습은 결코 짧은 기간에 형성되지는 않았다. 아름다운 뒷모습은 아름다운 한 생애의 전 삶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김수환 추기경이 굴곡 많은 한국 역사의 흐름 속에서 오랜 세월 가난하고 핍박받는 이들의 빛과 희망으로 살아온 것처럼. 손양원 목사가 나환자의 아버지로 사랑과 용서의 순교자가 되어 살아온 것처럼.

   ……(중략)……
   그동안 나는 혹시 외모에만 관심을 가지고 살아온 빈껍데기는 아니었는가. 문득 부끄럽다. 어찌 감히 위대한 이들의 뒷모습을 닮을 수 있으랴만, 진지한 마음으로 모방하려는 치기稚氣라도 부리면서 살고 싶다. 지금부터라도 뒷모습을 위하여 살아야 할 것 같다. 많이 늦었지만.

-<당신의 뒷모습>에서

 

   김수환 추기경의 삶을 글감으로 다루고 있다. 한 인간이 살고 간 후에 남는 뒷모습은 그의 한 생애를 통해 얻어지는 모습이다. 떠난 후에 남는 아름다운 그림자는 이와 같이 한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평생에 걸쳐 살아온 모습에서 얻어지는 잔잔한 그림자다. 한 인간의 삶이 다른 이들의 추앙을 받으려면 그만큼 아름다운 삶을 꾸려야 가능하다.
   그리고 그러한 삶은 다른 이에게 영향을 주어 따라 하도록 힘을 발휘한다. 김수환 추기경과 손양원 목사의 삶을 통해 작가는 따르고자 하는 소망을 갖게 된다. 지금은 이 순간 작가는 지난 삶을 반추해 보고 반성과 후회와 다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버스 토큰 제도가 처음 도입되었을 때만 해도 그게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을까, 회의적이었다. 차장이 버스 문 앞에 지켜 서서 일일이 차비를 받으려고 해도 냈느니 안 냈느니 승강이가 벌어지곤 했는데, 차장도 없는 버스에서 자발적으로 그런 일을 해낼 수 있을까 걱정이 많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게 이제는 자동승차권으로 변했는데도 별 애로 없이 잘 진행되고 있으니 얼마나 향상된 국민 수준인가. 정결한 공중화장실, 거기에 비치된 깨끗한 휴지, 음악이 있는 공원의 벤치, 이런 것들은 모두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차츰 우리의 곁으로 왔다.

-<풍경처럼>에서

 

   우리 사회의 긍정적 변화를 기술하고 있다. 무질서와 무원칙과 무력만이 난무하던 시절을 회고하며 달라진 현재의 모습에 긍정적 시각이 맞닿아 있다. 사회를 수용하는 자세 역시 긍정적이다. 무질서의 난무로 버스 토큰제도가 정착되려니 꿈도 꾸지 못하던 시절의 불안과 걱정을 기술하고, 달라진 오늘의 모습에 의미를 부여한다. 이 모든 작업은 현실에 대한 만족에서 비롯된다. 현실에 불만을 토로하며 또 다른 세계에 대한 동경을 하였다면 초월적 선택으로 인하여 이와 같은 결과를 얻어내진 못하였을 것이다.
   모든 것에 긍정과 만족을 하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작가의 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세계이다. 작가 이현수의 세상은 언제나 기쁨과 즐거움과 희망으로 차 있다.

 

   라. 순환의 눈빛-온고지신의 작가상
   작가 이현수에 있어서 ‘지금 여기’는 매우 중요하다. 영원한 지금에 서서 순간순간 반성하고 후회하면서 그 후회를 발판으로 자신의 삶을 꾸려간다. 인간이 사는 것은 언제나 현재일 뿐이다. 시간적 흐름은 오직 지금이라는 순간이 전제되는 때에만 의미가 있으며 가치가 있다. 지금을 충실히 사는 것만이 삶을 가치 있게 꾸려 가는 길이다.
   한 작가의 삶이 얼마나 가치 있는 삶이었느냐 하는 질문은 ‘지금’을 어떻게 충실히 풍부한 삶으로 채웠느냐에 달려 있다. 매 순간 반성과 후회를 하면서 자신의 삶을 재창조로 이어나갔다면 그 삶은 나름의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삶의 한가운데에 작가 이현수가 있다.
   그런데 작가 이현수의 경우 ‘지금 여기’는 언제나 과거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과거에 대한 반성과 후회의 궤에서 이탈하지 않는다. 그것도 과거의 경험과 같은 대상들의 조용한 삶이 온고지신溫故知新의 프리즘을 통하여 ‘지금’ 앞에 나선다. 무슨 철저한 계율처럼 이 과정을 거치고 있다.

 

   이상한 것은 모두들 그럴싸한 아호를 가지고 있는데 청운회 시절의 그 아호와 비슷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송松은 송재松齋로, 죽竹은 죽헌竹軒으로 바뀐 것이다. 아호의 의미가 현재 모습의 반영 혹은 닮고 싶은 모습의 구체적 표어라고 한다면 백운회는 모두 청운회 시절의 이상, 그 시절의 결의가 전 인생의 이정표가 된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한다.

-<푸른 꿈, 흰 꿈>에서

 

   청운회를 조직하여 함께했던 친구들이 지금에 와서 아호를 보니 당시의 호칭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더라는 것이다. 철저하게 과거에 묶이어 지금을 살아내고 있더라는 말이다. 이것은 과거의 삶에 만족하고 있다는 증좌이다. 만약 지난 삶이 불만투성이였다면 아무도 과거에 묶이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터이다.
   작가 이현수에게 과거는 언제나 온고지신의 자(尺)를 가지고 현재를 계측한다. 이 모든 것들은 자신의 일상생활에 만족하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내재적 선택에서 비롯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시골집은 무엇보다도 시골집다워야 한다. 넓은 앞마당에는 토실토실한 암탉이 병아리를 몰고 다니고 벽에는 씨종자 옥수수가 걸려 있어야 한다. 헛간 구석에는 덕석을 둘둘 말아 세워두고, 마당에는 평상이 있어야 한다. 꽃밭에는 봉숭아나 맨드라미 같은 꽃이 있고 꽃밭 주변에는 파나 부추 같은 것들이 자라고 있어야 제격이다. 돼지우리 지붕에는 호박넝쿨이 올라가고 두엄은 그 안에서 잘 삭고 있어야 한다.
   ……(중략)……
   우리가 지금 고민해야 할 것은 문화를 같게 하는 것이 아니다. 각 지역 문화의 변별성 그것을 발견하여 가꾸는 일이다. 지방에는 그 지방만의 특징과 풍습이 있고 말씨와 정서와 음식과 풍물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문화는 아직 설익은 새것을 이르는 말이 아니라 오래 묵어서 곱게 잘 삭은 것을 문화라고 한다.

-<새 것과 낡은 것>에서


   ‘곱게 잘 삭은 것’ 바로 이것이 무엇일까. 작가는 이것을 ‘문화’라고 했다. 평자는 이것을 작가 이현수의 작품세계라고 말하고 싶다. 전편에 걸쳐 나타나는 것은 일상을 살아내면서 그 삶에 만족하고, 그 일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내재적 선택의 길을 걷고 있는 작가는 매 순간 반성과 후회를 동원하고 있다. 즉 자신의 삶을 곰삭히는 과정을 거쳐 의미를 갖도록 한다는 것이다.
   ‘시골’이란 어휘 앞에 회고에 젖어들게 된다. 어린 날 자신이 성장한 삶의 터전이 잘 그려져 있다. 그리고 그 시골은 옛날의 분위기가 되살아나야 제격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도 그는 그 어린 날의 시골 삶터를 ‘잘 삭고 있어야 한다.’로 마무리한다. 언제나 그 자체로 영원히 있는 것이 아니라 발효하여 다음 시기에 기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과거는 뒤에 오는 ‘지금’을 위해 반성하고 후회하여 재창조와 궤를 같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역시 일상에 만족하여 의미를 부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3. 나가면서


   일상생활은 말없이 지나간다. 인간이 미처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대개의 경우 모르게 스쳐지나간다. 어찌 보면 흘려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 일상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에게는 모두가 소중하다. 자그마한 것까지도 나름대로의 의미를 가지고 독자 앞에 나서게 해야 한다.
   아니, 그 이전에 작가는 스쳐지나가는 것을 바라보다가 문득 ‘지나침’으로 가득 찬 삶에서 불안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그것들에 가치 있는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반성과 후회를 하게 되고, 자기 계발의 모드로 전환하여 삶의 원동력으로 삼게 되는 것이다.
   작가 이현수의 ≪당신의 뒷모습≫은 철저하게 이러한 경우에 해당한다. 매일 매일 일상생활에 만족을 느끼고 그것의 의미를 찾는 내재적 선택의 길을 걷고 있다. 이러한 것은 작가가 자신의 삶을 긍정적 시각으로 받아들이는 수용자세가 있기에 가능하다. 내재적 선택의 길은 수필집 전편에 걸쳐서 있다. 작가 자신을 성찰하는 데에도 있고, 가족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도 있고, 사회를 읽는 데에도 있으며, 시간의 흐름 속에도 있다. 그래서 매번 작가는 자신의 삶에서 반성과 후회를 통한 자아 성찰을 거쳐 재창조의 길을 걷게 된다.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 할지 모르나 특히 시간의 흐름에서는 과거는 ‘지금’의 의미 부여에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다. 왜냐 하면 작가 이현수는 언제나 온고지신의 생활 태도를 견지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난 세월과 현재가 서로 연관하여 의미 부여에 이바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작가 이현수의 눈은 아주 맑고 깨끗하다. 어디 하나 ‘아니오’로 얼룩진 흔적이 없다. 이 눈빛이 앞으로 세상의 밝은 곳을 더 비춰 주기를 주문하면서 다음 작품집을 기대해 본다.

 

 

강돈묵  -----------------------------------------------------
   문학박사, 수필가. ≪월간문학≫ 신인상 수상. 호서문학상 수상. 거제문화상 수상. 거제대학 교무, 학생, 교학, 평생교육원장 역임. ≪수필과비평≫, ≪대한문학≫, ≪문학세계≫, ≪포스트모던≫, ≪수필시대≫, ≪에세이스트≫ 편집위원. ≪현대수필≫ 이사. ≪한국문인≫ 기획상임이사. 수필집: ≪러브레터와 로비레터≫, ≪놓아주기 연습≫, ≪흔들리는 계절≫. 평론집: ≪본질 찾기와 수필쓰기≫ 외 다수. 현재 거제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