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과비평 2013년 8월호, 제8회 황의순문학상 수상자 백임현 대표작] 텃밭에 머무는 사계四季 외 2편 - 백임현
"사람에 대한 예의, 그리고 사람에 대한 존중과 배려, 일찍이 철이 들어 사람이 살아가는 이치를 몸으로 실천하며 살아온 아저씨, 그는 집안을 일으켰고 자신의 인생을 더 없이 자랑스러운 경지로 상승시켰다. 어린 나이에 빈주먹을 쥐고 오직 근면, 성실, 정직이라는 마치 초등학교 급훈 같은 좌우명을 생활의 지침으로 삼아 착하고 진실하게 살아온 아저씨, 그는 참으로 모래 속의 진주처럼 모범적인 사람이다. 나는 그런 사람을 훌륭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인생의 참 뜻을 배운다."
텃밭에 머무는 사계四季 외 2편 - 백임현
멀지 않은 고향에 조그만 텃밭이 있다. 시골길을 오르내리며 채마 가꾸는 일이 퇴직 후 우리의 중요한 일상이 되었다. 어린 시절 뛰놀던 고향의 흙을 다시 만지며 노년을 보내고 싶다는 것이 남편의 오랜 꿈이었기 때문에 채소를 심고 가꾸는 일에 보람과 즐거움을 느끼며 농사를 배우기 시작한 지 어언 십 년이 다가온다.
밭에 엎뎌 흙을 만지는 일, 그 자체는 중노동이 아니어서 노인들이 하기에 크게 무리될 것은 없다. 그러나 영농기술이라는 말이 있듯이 그것도 생명을 살리는 일이라 땅에 심기만 하면 저절로 자라주는 것이 아니다. 기술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때를 놓치지 않고 씨 뿌릴 때 씨 뿌리고 비료 줄 때 비료 주고 익은 곡식을 거둬들일 때 거두는 일이다. 이 모든 절차가 어김이 없어야 한다. 요즘은 비닐하우스가 있어서 계절에 관계없이 갖가지 과일 채소를 구경할 수 있지만 오로지 하늘만 쳐다보고 농사를 짓던 시절에는 농사철을 제대로 모르면 ‘철모르는 놈’으로 비하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조선시대 ‘농가월령가’는 다달이 절기에 따른 농사일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시기에 맞춰 부지런히 일할 것을 권유하고 있다. 적으나마 농사라고 흉내를 내고 있는 우리도 ‘철모르는 농부’가 되지 않으려고 계절의 변화에 남달리 민감하다.
햇살이 눈부신 3월이면 이 땅에 봄이 온 것이다. 옛날 선조들은 겨울이 한창인 2월 초순에 입춘立春을 세워 봄소식을 전했으나 우리가 피부로 느끼는 봄은 3월이다. 3월이면 전국의 신입생들이 새 옷을 입고 입학식을 하면서 싱그러운 봄의 서곡을 시작한다. 도시의 봄은 아이들의 부푼 꿈이 있어 희망의 계절이게 한다. 이때쯤이면 우리도 겨우내 던져두었던 농기구의 먼지를 털고 연장을 챙겨 밭으로 간다. 밭에 나가 무질서하게 널려 있던 폐비닐을 걷어내고 이랑을 고르며 대지의 겨울잠을 깨운다.
3월 말이 다가오면 밭 가운데 심은 목련이 백옥 같은 봉오리를 부풀리고 채마밭 둘레의 쥐똥나무에서는 마디마디 좁쌀 같은 새 순이 함성처럼 일제히 솟아오른다. 아직 쌀쌀한 날씨인데도 어느새 파밭에는 언 땅을 뚫고 돋아난 생기 있는 연둣빛이 봄을 재촉한다.
우리는 채소 욕심이 많다. 그래서 해마다 많이 심는다. 토마토, 가지, 고추, 고구마, 콩 등 갖가지 채소를 오백여 평 채마밭에 빈틈없이 모종한다. 무공해 채소를 좋아하는 이웃 친지들과 나눠 먹기 위해서다. 작물이 가득한 밭에서는 하루가 다르게 채소가 자라고 잡풀도 자란다. 하늘은 공평하여 잡초도 독초도 자라게 하지만 농부들은 여름내 잡초와 싸우느라 땀을 흘린다.
해마다 하지가 다가오고 장마가 시작될 무렵이면 극심한 가뭄이 온다. 그래서 농촌에는 닷새장이 깨어져야 풍년이 든다는 말이 있다. 다시 말해 닷새마다 비가 와야 한 해 농사가 제대로 된다는 것이다. 더하고 덜 한 해는 있어도 가뭄은 통과의례처럼 찾아오는 초여름의 불청객이다. 특히 지난해 한발旱魃은 예년에 없는 기세로 대지를 태워 뿌리가 약한 작물은 거의 다 해를 입었다. 정성을 다해 돌보던 채소들이 몸을 가누지 못하고 스러져 가는 정경은 애처롭고 안타깝다. 이렇게 애를 태우다 지쳐 농사를 포기할 무렵이면 그제야 구세주처럼 비가 온다. 죽어가던 모든 초목이 몇 모금 물을 마시고 생기를 찾아 되살아나면서 채마밭은 다시 푸르러진다. 그때마다 자연재해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가를 확인하게 되는 것이 가뭄이다. 아무리 애를 써도 하늘이 살리지 않으면 안 된다. 일 년에 한 번씩 하늘은 이런 식으로 인간의 오만을 경계하는 것 같다.
여름내 짙푸르던 녹음이 엷은 갈색으로 물들면서 시름에 잠기면 하늘은 아득히 높아지고 텃밭 위에는 쌍쌍이 짝지어 나는 고추잠자리의 군무로 눈이 어지럽다. 어느 틈에 텃밭에 가을이 머물고 있다. 고추가 붉게 타고 산에서 들에서 흙속에서 이 땅의 모든 열매들이 알알이 여물어 씨앗을 만들고, 풀밭에 사는 풀벌레까지도 애절한 울음을 울며 짝을 찾는 계절, 인간에게는 가을이 추수동장秋收冬藏의 풍성한 수확의 계절이지만 그러나 가을은 땅 위의 초목에서부터 티끌 같은 작은 벌레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종을 보존하기 위해 조용히 그러나 분주하게 한철의 생을 마감하는 엄숙한 계절이다.
이슬이 얼어 서리가 되는 한로상강寒露霜降 절기가 되면 머지않아 입동立冬이다. 그때부터 텃밭은 쇠잔해 가는 모습으로 처량하다. 몇 차례의 된서리를 맞고 나무막대가 되어 서 있는 고춧대, 토마토, 가짓대 등의 모습은 생명의 무상감을 느끼게 한다. 비록 초목일망정 저것들에게도 활기 넘치는 싱싱한 전성기가 있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만물은 변한다. 생성이 있으면 소멸이 있고 전성기가 있으면 쇠퇴기가 있다. 그것이 음양의 이치다. 그것이 사람이라고 다르겠는가.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운명을 안고 태어난 우리의 삶도 이 원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 죽는 것도 사는 것도 피할 수 없는 자연의 순환이며 인간의 숙명이다. 이 엄숙한 원형리정元亨利貞의 원리야말로 가장 뚜렷이 드러나는 우주의 법칙이며 변역變易과 불역不易의 핵심사상이다.
추수가 끝난 텃밭은 황량하게 비어있다. 그 무성했던 생명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원시반종原始反終, 모든 생명은 원래 있던 자리로 되돌아간다고 <주역周易>은 말한다. 자연이 성서라는 말이 있다. 우주만물의 이치와 근원이 그 속에서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옛날 은자들은 세속을 버리면 자연으로 돌아갔다. 내일은 상추 아욱 쑥갓 씨를 뿌리러 간다. 텃밭에 또 다시 봄이 오고 있다.
나의 삶 나의 수필
내가 어렸을 때, 처음 써 본 글은 <거지>라는 제목의 짤막한 작문이었다.
자기가 쓴 글을 앞에 나가서 읽는 시간이었다. 내 차례가 되자 아이들은 <거지>라는 제목을 듣고 교실이 떠나갈 듯이 한꺼번에 와르르 웃었다. 나는 이 갑작스러운 상황이 너무도 당황스럽고 무안하여 어쩔 줄 모르다가 기어코 울고 말았다. 그때 선생님이 칠판을 두드리며 법석을 떠는 아이들을 진정시키면서 말씀하셨다.
“<거지>라는 제목을 듣고 너희들은 웃었지만 <거지>를 보고 임현이는 글을 썼다. 자- 무엇을 썼는지 잘 들어 보도록 하자.”
그런 다음 울고 있는 나를 달래주고 선생님이 그 글을 읽었다. 그리고 선생님은 아주 잘 썼다고 칭찬을 해 주었다. 무엇 하나 다른 사람의 주목을 받지 못하던 내가 처음으로 쓴 <거지>로 인해 듣게 된 선생님의 칭찬은 나로 하여금 글짓기에 관심을 갖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내가 성장하던 그 시기는 시국이 어지럽고 궁핍한 시대였다. 조국의 해방, 분단과 이념의 갈등, 그리고 뒤이어 일어난 전쟁, 극심한 빈곤, 이러한 역사적 격동과 사회적 환경 속에서 거지 아닌 사람들의 생활이라고 해서 별반 나을 것도 없었다. 내가 <거지>에 대해 글을 쓸 무렵 우리 집도 일곱 식구가 끼니걱정을 하며 힘들게 살고 있었다.
대종가의 종손이었던 아버지는 해방 후 단행된 토지 개혁으로 많은 땅을 경작자인 소작인들에게 넘겨주고 졸지에 대책 없는 가난뱅이가 되었다. 지금껏 고생을 모르고 살아온 아버지는 갑자기 닥친 참담한 현실에 대처할만한 능력이 없었다. 때때로 끼니를 걸러야 했고, 오남매 중 더러는 공부도 중단해야 했었다. 그때부터 가난은 숙명처럼 내 생애에서 떠날 줄을 모르는 삶의 일부가 되었다.
아버지는 평생을 교직에 계셨던 청빈한 학자였다. 밥을 굶는 상황에서도 새벽마다 성현의 글을 읽으시며 우리의 아침잠을 깨웠고, 우리가 책을 안 읽으면 ‘흐르는 물은 썩는 법이 없다.’며 책 읽기를 독려하였다. 그러나 청빈이라는 고매한 수사의 그늘 밑에서 우리 가족은 극심한 빈곤을 뼈저리게 체험해야 했고 어린 나이에 겪은 무서운 전쟁의 비극은 우리의 삶이 고단한 길이라는 것, 인생이 기쁨보다는 힘든 고해임을 당면한 현실에서 배우게 하였다. 그래서 나의 젊은 시절은 염세적 허무주의 속에서 우울했다.
중학생 때 이웃에 살던 언니는 시를 좋아하는 문학소녀였다. 하이네, 바이런, 괴테 등 서양시를 고운 목소리로 읽어주면서 나에게도 시를 쓰라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시보다는 살아가는 이야기가 있는 소설이 좋았고, 쓰고 싶은 것도 시보다는 소설이었다. 그 시대 우리의 현실은 너무나 산문적이어서 시적 환상을 가질 수가 없었던 것이다.
1960년대 초 교사의 아내가 되었다. 그러나 마음 놓고 책을 사 읽을 형편은 못되었다. 서울 변두리 단칸방을 전전하면서 시장의 영세한 책방을 드나들며 읽고 싶은 책을 대본해 보았다. 문예지인 <현대문학>을 읽고 일기를 쓰고. 살림하는 주부가 내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어서 우는 아기를 업고 골목길을 오르내리며 책을 읽었고, 한 손으로 일할 때는 다른 한 손에 책을 들고 읽었다. 이렇게 인생의 고비 고비를 함께한 문학은 고단한 내 삶의 위안이었고 나의 정체성을 지키는 유일한 자존심이었으며 꿈을 향한 애잔한 기원이기도 하였다. 그 소망은 1980년대 중반 수필문학 등단으로 이루어졌다.
나는 가수 신중현을 좋아한다. 허기와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미친 듯이 기타를 치고, 서양의 <록> 음악에 한국인의 정서와 가락을 접목시켜 우리 고유의 독창적인 <록> 가요를 정립한 전쟁고아 신중현, 그의 음악을 들으면 글이 쓰고 싶어진다. 그의 철저한 장인 정신과 예술을 향한 치열한 도전의식이 감동으로 가슴을 뛰게 하는 것이다.
또한 <옥이이모>를 쓴 김운경의 작품을 보면 글이 쓰고 싶어진다. 김운경의 드라마에는 착하고 진실하게 살아가는 서민들의 애환과 고운 꿈이 있다. 그들은 유창한 설교 한 번 들은 적 없어도, 인생독본 한 권 읽은 바 없어도 사람이 살아가는 도리와 남루하지만 행복하게 살 줄 아는 나름대로의 철학이 있다. 너무 가난하여 싸구려 신발 한 짝 가지고 싸우고, 십 원짜리 내기화투를 치며 핏대를 올리면서 고달픈 현실을 위로받는 사람들, 연탄장수와 구멍가게 딸내미와의 가난하지만 아름다운 사랑, 김운경은 그런 사람들의 갸륵한 삶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어서 놓치지 않고 작품으로 형상화한다. 작가의 따뜻한 가슴과 섬세한 시각이 나를 사로잡는다. 김운경은 작가의 책무가 무엇인가를 깨닫게 한다. 얼마나 치열해야 좋은 글을 쓸 수 있을까. 얼마만큼 인생을 사랑해야 좋은 글을 쓸 수 있을까. 신중현의 음악을 들으면, 김운경의 드라마를 보면 늘 이런 고민에 빠진다.
나는 글재주가 없는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이제까지 다만 문학을 좋아하면서 살아왔을 뿐이다. 어떤 여건에서도 이것은 흔들림이 없었다. 내가 만일 농부農婦였다면 콩밭을 매는 밭이랑에서 글을 구상했을 것이고, 공장의 노동자였다면 시끄러운 기계음 속에서 문장을 외웠을 것이다. 나는 살림을 하는 주부였기에 시장 길을 오가면서 글감을 찾았다.
새봄이 되면 주택가에는 낡은 집을 허물고 새 집을 짓는 곳이 많다. 주택가의 봄은 언제나 집 짓는 사람들의 활기찬 고함소리와 힘차게 돌아가는 레미콘의 굉음으로 시작된다. 나는 그 현장이 좋아 시장에 갈 때마다 호기심 많은 아동처럼 한참씩 서서 구경하곤 하였다. 거기에는 뭔가 희망적인 설렘이 있다. 그래서 쓴 글이 <집을 짓는 사람들>이었다.
시장에는 정직한 삶의 실체가 있다. 변성기도 아닌데 날마다 소리소리 외치며 물건을 팔아 벌써 어른처럼 음성이 탁하게 쉬어버린 나이 어린 생선장수. 너무도 잘생긴 사장 같은 사람이 납작한 판잣집 추녀 밑에서 온종일 팔리지 않는 빵을 굽고 있는 권태로운 모습, 이런 정경들이 가슴을 친다. 서민 주택가에서 늘 그들의 애환을 목격하며 살아왔기에 나의 작품세계는 사람들의 절실한 현실과 삶의 모습이 있을 뿐, 고도의 관조나 명상적인 것이 없다. 삶이 곧 문학이었기 때문이다.
글을 쓰기 시작하고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백지 앞에서 언제나 자신 없는 초보다. 당나라의 불우한 시성 두보杜甫는 ‘만 권의 책을 읽으니 붓끝에 신이 오른 듯 시가 써지더라讀書破萬卷 何筆如有神.’고 하였다. 그런 경지는 아니더라도 내가 쓴 단 한 편의 수필이, 단 한 줄의 문장이 민들레 씨앗처럼 누구의 가슴에서 꽃처럼 살아나고 쥐똥나무꽃같이 숨어서 향기로운 글이 되기를 감히 꿈꾸며 오늘도 글을 생각한다. 어린 날 <거지>로부터 시작된 나의 문학은 결핍의 소산이었다. 내가 만일 태평한 시절에 태어나 고생을 모르고 살았다면 오늘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학에 대한 꿈은 내 인생을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이 풍요롭고 부유하게 해 주었다. 가난한 나는 오늘도 수필을 쓰면서 부자처럼 가슴 충만한 감사와 행복을 느낀다.
훌륭한 사람
집안에 내가 좋아하는 아저씨 한 사람이 있다.
나이는 이십여 년이나 손아래지만 항렬이 높아서 그는 아저씨가 되고 우리는 조카뻘이 된다. 이런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연륜을 초월해서 우리는 매우 절친하게 지낸다. 그는 어려운 환경에서 불우하게 성장하였지만 인성이 따뜻하고 넉넉하여 그를 만나면 심경이 울적할 때라도 저절로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 아저씨는 집안이 어려워 중학교를 겨우 마치고 돈벌이를 위해 객지로 나서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자신이 집을 떠나게 되면 땔감이 없어 추위에 고생하실 어머니가 무엇보다 마음에 걸려 날마다 높은 산에 올라가 하루 다섯 짐씩 나무를 하였다. 한 달을 그렇게 하니 쌓아 놓은 나뭇가리가 웬만한 집채만 하였고, 그 나무는 어머니가 삼 년을 때고도 남았다고 한다. 우리와 만나면 아저씨는 어릴 때 객지에서 고생하던 이야기를 자주 한다. 매양 같은 말을 여러 번 들어도 질리지 않는 것은 어린아이의 기특한 효심이 늘 우리를 감동시키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를 성공한 사람이라고 칭찬을 하지만 그는 어릴 때부터 될성부른 나무였다.
나이 어린 그가 서울에 와서 처음 취직이라고 한 것은 보일러 일이었다. 아파트가 일반화되지 않던 1960, 70년대에는 일반주택의 온돌방이 보일러시설로 교체되는 시기여서 직업은 때맞추어 잘 선택한 것이었다. 그러나 어린 사람이 하기는 힘든 작업이었다. 환기가 잘 안 되는 음습한 지하공간에서 무거운 쇠파이프를 나르고 강력한 접착제와 페인트칠을 해야 하는 일은 어른도 힘든 노동이었다. 그러나 그는 기술을 배워야겠다는 일념에 어린 뼈가 휘도록 일을 하였다. 성품이 어질고 착한 그는 그렇게 일한 돈으로 한 푼이 생기면 어머니께 드리고, 두 푼을 벌면 어머니를 모시는 큰형님 살림을 도왔다.
같이 일하던 친구들은 힘들다고 중간에서 그만두는 경우가 많았으나 아저씨는 포기하지 않고 묵묵하게 일하면서 그 분야의 기술을 익히고 설비의 원리를 연구하여 오래지 않아 그 방면의 우수한 기술자가 되었다. 그로부터 삼십여 년이 지난 지금, 아저씨는 오랜 세월의 현장경험을 토대로 누구도 따를 수 없는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었고, 성공한 사장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그가 주로 하는 사업은 낡은 집을 리모델링하거나 새 건물을 짓기도 하는 소규모의 건축업이다. 그러나 그를 찾는 고객은 사회의 명사들이거나 부유층이 많다. 한번 일을 맡겨 본 사람들은 그의 정직성과 성실성을 믿어 다시 찾게 되고 또 연결 연결 이어져서 불경기에도 그에게는 일이 밀린다. 사회의 수준 높은 사람들과 접촉하는 동안 틈틈이 공부를 해서 학식으로나 교양으로나 이제는 어디에 가도 꿀리지 않는 훌륭한 지식인으로 성장하였다. 아저씨의 성공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그의 결혼이다. 시골의 중학 졸업이 학력의 전부인 아저씨가 부잣집 외동딸인 대학 출신의 재원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이었다. 신랑의 사람됨을 보고 장인어른이 기꺼이 사위를 삼았다고 한다. 부유한 집에서 고생을 모르고 자란 아가씨와 평생 일만 하며 살아온 빈한한 아저씨와의 혼사는 어느 모로 보나 세간의 통념을 넘어선 경사이며 생애 중 가장 빛나는 성공이었다.
그야말로 부잣집 귀한 공주를 아내로 맞이한 아저씨는 아내의 품위와 자존심을 지킬 수 있도록 모든 여건을 만들어 주려고 최선을 다하며 아내 역시 남편의 지극한 애정에 감사하면서 그들은 세상 어느 부부보다 행복하게 잘살아가고 있다.
온 천지에 아까시꽃이 한창일 때, 그들 내외가 드라이브를 가자고 왔다. 집사람(아내)이 아까시꽃 향기를 좋아해서 꽃이 많은 동산을 찾아 간다는 것이었다. 흰 꽃이 눈처럼 뒤덮인 계곡에 이르자 차를 멈추고 그 향기에 취해 철부지처럼 좋아하는 아내, 그 모습을 바라보며 행복해하는 남편, 푸르른 계절, 한 폭의 그림처럼 그들의 모습이 아름다웠다.
나는 아저씨에게 물었다.
“아저씨는 어떻게 부인한테 그렇게 잘할 수가 있어요?”
“나하고 살겠다고 온 사람, 하고 싶다는 거는 해줘야지 않겠어요.”
하며 빙긋이 웃었다. 이런 남자를 누가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사람에 대한 예의, 그리고 사람에 대한 존중과 배려, 일찍이 철이 들어 사람이 살아가는 이치를 몸으로 실천하며 살아온 아저씨, 그는 집안을 일으켰고 자신의 인생을 더 없이 자랑스러운 경지로 상승시켰다. 어린 나이에 빈주먹을 쥐고 오직 근면, 성실, 정직이라는 마치 초등학교 급훈 같은 좌우명을 생활의 지침으로 삼아 착하고 진실하게 살아온 아저씨, 그는 참으로 모래 속의 진주처럼 모범적인 사람이다. 나는 그런 사람을 훌륭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인생의 참 뜻을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