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과비평 2013년 9월호, 143호 신인상수상작] 슈퍼 달과 곰 인형 - 유정혜
"많이 걷다 보면 용기도 생기고 잠도 잘 오고 웬만한 것들은 잊게 된다는. 자연은 배반하는 일 없으니 평생을 친구 삼아도 모자람이 없으리라. 아무것 하나 준 적이 없어도 바람소리, 새소리, 나무들끼리 속삭이는 소리를 들려준다. 저희들끼리 어떻게 해 달라는 바람없이 고운 색으로 단장해 가며 늘 사람을 이롭게 하는 곳. 곰 인형도 아무 말 없으나 나를 위로해 주었고, 슈퍼 달도 말없이 곰 인형을 비춰주어 나를 이끌어 인연을 맺게 했으니, 슈퍼 달도 곰 인형도 나에게는 친구임에 틀림없다."
슈퍼 달과 곰 인형 - 유정혜
실로 어마어마한 달을 봤다. 이름 하여 슈퍼 문. 지구 주위를 타원궤도로 돌다 지구와 가장 가까워졌을 때의 모습으로, 달과 지구의 평균 거리는 38만km지만 6월 23일 슈퍼 문과의 거리는 35만 7천km까지 가까워졌다 하니 내가 본 보름달 중 가장 큰 달을 보게 된 것이다. 반대로 올 12월 17일에는 가장 작은 달을 보게 될 것이라니 천체란 한 물체를 변형된 모양으로 보여주는 무성영화 같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또 달과 지구와 가까워지면 그에 따라 밀물과 썰물 조석간만의 차가 평소보다 커지지만, 지진이나 해일로 인한 피해는 없다니 다행한 일이다. 그날 달을 보면서 그리운 얼굴들을 떠올렸다. 모두 소중한 사람들. 평생을 빌어도 모자라는 마음을 달에게 전하며 나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그리움을 가슴에 담았다.
이별은 분명 마음 한구석을 도려내는 아픔이다. 아이들이 외국으로 떠날 때는 정말 까마득히 멀어지는 텅 빈 마음으로 대숲에 바람일 듯 마냥 흔들렸다. 딸아이의 침대에서 남겨진 온기를 느껴 보려고 한참을 누워 있기도 하고, 입던 옷들을 꺼내 다시 정리하다 입어 보기도 하고, 두고 간 식기들과 책들을 쓰다듬으며 안녕을 빌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가슴은 더욱 애잔해지는 것 같아 누구에게 들키기라도 하듯 사람들을 외면했다. 산책하는 것도 밤을 택했다. 슈퍼 달이 뜬 날 저녁, 아파트를 걷고 있는데 재활용품 통 위에 뱃속이 텅 빈 큰 곰 인형이 있었다. 텅 빈 뱃속에 달빛을 가득 담고 앉아 달은 마치 이 곰 인형을 거풍시키기 위해 뜬 것처럼 그 속을 훤히 비추어 덩치가 큰 사람처럼 앉아 있었다. 한참을 바라보다 갖고 오고 싶은 마음을 누구에게 들킬까 싶어 외면하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몇 바퀴를 돌았을까. 곰 인형은 그 자리에서 우두커니 달만 바라보고 있었다. 가까이 가 보니 누구의 사랑을 받다 버려졌는지 멀쩡한데 속만 파헤쳐져 허리를 바로 펴지 못하고 어정쩡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측은해 창피한 것도 잠시 그것을 들고 집으로 왔다. 어쩌란 말인가. 측은지심을 참지 못하는 본능! 타고난 팔자인 것을.
곰 인형은 때가 묻어 고약한 냄새가 났다. 언젠가 나도 죽을 때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시신이 되어 곰 인형의 모습처럼 몰골이 초라해질 수도 있을 것이니 그냥 지나칠 일도 아니었다. 먼 훗날 그리 안 될 것이란 보장도 없으니. 진시황도 죽었을 때 후계자를 정할 때까지 시신 썩는 냄새를 없애기 위해 시신 위에 절임 생선을 얹었다고 하니 만고의 위대한 업적을 남긴 그도 죽음 앞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음을 말해준다. 이런저런 생각에 나는 곰 인형 씻을 준비를 했다. 그래 너를 깨끗이 씻어 주마! 그 인형을 세탁기로 세탁할 때 털이 빠질까 염려 되어 보자기 하나로 머리를 싸고 또 하나의 보자기로 몸을 싸서 세탁을 했다. 그리고 일주일쯤 말렸더니 몸이 뽀송뽀송하니 제법 인물 좋은 곰 인형이 되어 바라보는 눈이 반짝 인다. 지금은 소실되어 없어진 농월정계곡이나 통도사계곡 같은 곳에 가면 그 맑은 물에 발을 담그고 물고기들이 노는 모습을 보다가 내 속도 뒤집어 맑은 계곡물에 씻어 햇빛 달구어진 바윗돌 위에 얹고 말려 다시 집어넣으면 온몸과 정신이 깨끗해질 것만 같은 생각을 여러 번 한 적이 있다. 억울함도 분노도 화냄도 배반까지도 모두 씻어 버리고 맑은 정신으로 살 수 있을 것 같은 허망한 생각을.
사람이 살아가면서 좋은 일만 있을 수는 없지만 때로 억울한 생각에 ‘나의 너를 보지 말고 너의 나를 보라.’는 어느 분의 말씀으로 마음을 달래기도 했다. 사람 모이는 곳에 좋은 사람만 있을 수는 없겠지만 간혹 얼토당토 않는 일을 당하기도 한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 개천을 흐린다는 말이 있지만, 그 미꾸라지는 자기의 부족함을 그렇게라도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으니 어쩌랴. 마음으로 용서하는 수밖에. 내 마음은 내가 다스려야지 하고 마음 먹었으나 사람들이 싫어졌다. 사람들이 무서워졌다. 정말 내 마음을 들켰다 싶은 것은 불면증이다. 오래도록 잠을 이루지 못해 신경내과를 찾아가 병원 처방을 받고서야 겨우 잠을 이루었다. 의사선생님 말씀을 다 전할 수는 없지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본인한테 찾아가 할 말을 하고 많이 걷고 즐겁게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논어論語≫ 공야장편公冶長篇에 “처음 내가 사람을 만날 때는 그 사람 말을 듣고 말과 행동을 믿었지만 이제 보니 그 남이 달라졌더라. 이제는 행동하지 않고 말만 하는 것을 지켜보겠다.”라는 말과 흡사한 내용이다. 어찌 살아 온 과정을 다 이야기하리요. 하기야 물 더러우면 발 씻고 깨끗하면 얼굴 씻으면 될 일이다.
갈증이 날 때는 물 한 모금도 고마운 법이니 갈증을 채우고 나서 물이 적다고 한 다면 어찌 인의仁義를 안다고 할 것인가? 또래의 젊은이가 있었는데 한사람은 학식이 많고 한 사람은 평범한 농부였다. 농부는 소를 돌보며 다른 일까지 열심히 했고 다른 이는 소코에 수수이삭을 꽂아 자기 소 표시를 하고서는 책만 보고 있었다. 저녁이 되자 농부는 자기 소들을 몰고 집으로 돌아갔고, 책만 보고 있던 학식이 높은 사람은 자기 소를 찾지 못해 이리저리 뛰어 다니자 마을 사람들이 ‘왜 이리 급하신가?’ 물었다. 그 사람이 ‘소코에 수수이삭을 꽂아 둔 우리 소가 없어졌다.’고 하자, 마을사람들이 ‘에이 이 사람아 그 무슨 짓인가, 수수이삭을 소코에 꽂으면 소가 먹어버리지.’ 했다는 것이다. 학식이 있어도 지혜나 판단력이 없으면 아무짝에도 쓸모없으며, 썩은 나무는 땔감도 목재로도 쓸 수 없으니 사람은 모름지기 신언서판身言書判을 갖추어 올바른 판단력으로 살아가야 함을 마음에 새긴다.
아무튼 나는 곰 인형을 딸 삼아 혹은 친구 삼아 종일 끌어안고 며칠을 보냈다. 후덥지근한 날씨에 털이 많아 안고 있으면 더운데도 그것을 자식처럼 안고 뒹굴며 베개처럼 한 몸처럼 곰 인형을 곁에 두고 지냈다. 참 이상하게도 위로가 되었는지 잠도 좀 잘 수 있었고 식구 하나 생긴 것같이 든든했다.
내가 산을 찾은 것은 며칠 후의 일이다. 비슬산 줄기의 앞산은 가까우나 오름이 높은 편이어서 오르막이 힘들고, 거리는 멀지만 은해사는 완만하여 편안하다. 혼자서 걸을 때도 주위에 사람이 많으니 걱정할 일도 없다. 작은 봇도랑을 쳐다보며 흐르는 물결에 몸을 맡겨 한가로움을 즐기는 물고기를 보는 것 또한 자연이 주는 선물이니 놓치지 않는다. 몇 분 걸리지 않은 곳에 은해사 대웅전이 보이고 그 주변에는 기암괴석과 자연경관이 마음을 탁 트이게 한다. 앉을만한 공간이 많아 잠시 쉴 때 누가 물수제비를 뜨고 있었다. 돌은 나지막하게 몇 개의 포말을 일으키며 씻기어져 물속으로 가라앉는다. 깨끗한 물에 몸을 씻는 돌. 나도 저 일급수에 씻기는 돌이 되고 싶었다. 그 행위는 한참이나 계속 되었다. 구경하던 행인들도 하나 둘 자리를 떠나고 나도 약간의 힘을 얻어 좀 더 오르기로 했다. 길옆에는 작은 야생화들이 수입 꽃보다 더 곱고 앙증맞게 피어있다. 누가 물을 주지 않아도 스스로 피어 길 가는 이들의 마음을 달래주는 야생화를 보면 즐거워진다. 야생화 옆에는 몇 년 동안 쌓여 있던 나뭇잎들이 썩어 거름이 되고 돌들은 흙을 싸안고 튼튼한 둑을 이루고 있다. 이름도 알 수 없는 많은 나무들 저희끼리 어깨동무하며 동네를 이루어 그늘도 되고 목재도 되거늘 사람은 어찌하여 자연만 못하단 말인가.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그닥 어려운 일도 아니건만 이기심으로만 치닫는 인간의 모습을 보며 참 안타깝다는 생각을 한다. 한참을 오르다 바위 위에 몸을 기대고 좀 쉬기로 했다. 바람이 서늘하다. 나뭇잎 사이로 하늘이 보였다. 구름이 보였다. 새들도 날아가고 아름다운 자연에 와서 힘을 얻으니 의사 선생님 말씀이 생각난다. 많이 걷다 보면 용기도 생기고 잠도 잘 오고 웬만한 것들은 잊게 된다는. 자연은 배반하는 일 없으니 평생을 친구 삼아도 모자람이 없으리라. 아무것 하나 준 적이 없어도 바람소리, 새소리, 나무들끼리 속삭이는 소리를 들려준다. 저희들끼리 어떻게 해 달라는 바람없이 고운 색으로 단장해 가며 늘 사람을 이롭게 하는 곳. 곰 인형도 아무 말 없으나 나를 위로해 주었고, 슈퍼 달도 말없이 곰 인형을 비춰주어 나를 이끌어 인연을 맺게 했으니, 슈퍼 달도 곰 인형도 나에게는 친구임에 틀림없다. 꼭 사람이 아니라도 달도 인형도 사람과 함께하면 그것도 자연의 일부인 것을. 슈퍼 달을 본 것도, 곰 인형을 만난 것도 감사할 일이다. 나는 이제 자연과 벗하며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자연이 주는 교훈을 지침 삼아 살고 싶다. 문득 두고 온 곰 인형이 그리워 다시 몸을 돌렸다.
유정혜 ------------------------------------------------
대구 출생.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 방송문예학과 졸업. 미술학원장 역임. 가톨릭신문사 문화부 기자 역임. 다북쑥 회원.
당선소감
먼 길 걸어 온 듯하다. 비 오면 비처럼 바람 불면 바람처럼 치열하게 살았다. 사람과의 일 부질없고 산다는 것 역시 미궁이지만, 살아온 걸 보면 살만했던 모양이다.
9월이 오기까지 여름은 길었다. 잎새가 숲을 설레게 하듯 그렇게 소식이 왔다.
가슴 아픈 일들은 이제 잊기로 한다.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도 이쯤에서 접고 수줍게 씨앗 하나 심어본다. 지구 저편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꽃을 피게 하리라.
이제껏 마구 던져 버렸던 나를 사랑해야지 다짐해 본다.
뽑아주신 심사위원께 감사드리고, 부족한 점 묵묵히 지켜봐 주시고 조언해 주신 교수님께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