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과비평 2013년 7월호, 사색의 창] 비 오는 날 - 조우정
"사정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따라 가느라 몸도 마음도 지쳐 있을 때 비오는 날은 내게 잠깐 멈추고 쉬라고 한다. 정신없이 달려온 길을 돌아보라고 비가 내린다. 잊고 지낸 추억을 떠올리며 미소 지으라고 비가 내린다. 삭막해져 가는 메마른 내 정서를 촉촉이 적셔주기 위해 비가 내린다. 그래서 나는 비 오는 날을 좋아한다."
비 오는 날 - 조우정
나는 비를 좋아한다. 소리 없이 살포시 내리는 이슬비를 좋아하고 시원한 바람과 함께 툭, 툭 떨어지다 탄성을 지르듯 쏟아지는 장대비도 좋아한다. 우산을 쓰고 빗속을 천천히 걷는 것을 좋아하고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를 피해 처마 밑으로 허둥지둥 달려가는 발걸음도 즐겁다. 비를 좋아하는 건지 아니면 비 오는 날을 좋아하는 건지 아무튼 나는 비 오는 날을 기다린다.
새벽녘 어렴풋이 들리는 빗소리가 꿈이 아니길 바라며 창문을 열어 확인했을 때 새벽 단잠을 30분 더 잘 수 있는 호사를 누리는 날이 비 오는 날이다. 겉으로는 비가 와서 오늘 할일이 미루어진다는 생각에 쯧쯧 혀를 차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오늘은 쉴 수 있겠는 걸.’ 하고 회심의 미소를 몰래 짓는 날이기도 하다.
농촌에서는 비 오는 날이 휴일이나 마찬가지다. 연일 계속되는 장마는 황금연휴이기도 하다. 아침부터 쉽게 그칠 것 같지 않은 장대비가 오는 날에는 시아버님은 낡은 작업복 대신 장롱 속에서 잘 다려진 바지와 흰색 여름 잠바를 꺼내 입으셨다. 뽀얗게 먼지가 앉은 구두를 쓱쓱 닦아 신고 시내 복덕방에 나가셨다.
어디선가 고소한 냄새가 풍겨오기 시작하면 시어머님도 옆집 할머니들과 나란히 마을 회관으로 가셨다. 비 오는 날은 칼국수를 밀고 부침개에 막걸리를 마시며 날궂이를 하는 날이다.
시부모님이 안 계신 집에서 나는 마음껏 여유를 즐길 수 있다. 비 오는 날은 시집살이를 잠시 잊게 해 주는 날이다. 청소도 미루고 빨래도 미루고 커피 물부터 받는다. 비오는 날에는 일회용 커피 믹스가 아닌 원두커피 향기를 집안 가득 풀어 놓고 책상 앞에 당당히 앉는다. 그러면 그동안 얼굴만 잠깐 보고 제쳐둔 잡지들과 아끼면서 천천히 음미하던 고전들이 간택을 기다리듯 다소곳이 나를 바라본다. 그래서 나는 비를 기다린다. 이른 아침부터 창문을 세차게 두드리며 찾아온 비라면 더욱 반갑다.
원두커피 내려지는 소리가 빗소리와 어울려지면서 방안 가득 커피향이 퍼진다. 비가 오면 생각나는 추억들과 호젓하게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신다. 웬만하면 비오는 날에는 음악을 듣지 않는다. 빗소리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눈을 감고 빗소리를 들으면 빗방울이 떨어지는 곳마다 빗방울의 크기와 세기에 따라 제각각 중독성 있는 박자에 빠져들게 된다. 빗소리에 취해 달콤한 낮잠이 들어도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이 없으니 나는 비 오는 날이 좋다.
사랑이 시작될 때 비가 내리는 장면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종종 볼 수 있다. 우연히 소나기를 만나 둘이 손잡고 뛰어가거나 우산을 건네주고 멋있게 비를 맞으며 뒤돌아서는 남자 주인공, 때론 빗속에서 화해하고 사랑을 재확인하는 연인들을 본다. 비를 맞으면 마음속까지 촉촉해져서 사랑의 싹도 잘 트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아쉽게도 나는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시원하게 소나기가 내리는 한여름이 아닌 엄동설한에 남편을 만나 힘들게 사랑의 싹을 키워 결혼을 했다. 게다가 부모님과 함께 살고 싶어 하는 남편을 따라 시골에서 살게 되었다.
봄이 되면 제비들이 찾아와 낡은 집을 보수해서 새끼를 치고 개구리 울음소리를 들으며 논둑길을 산책할 수 있는 농촌생활은 힘들어도 그나마 정겨움이 있었다. 특히 비 오는 소리와 비가 그친 뒤에 농촌풍경은 언제나 내 마음을 설레게 했다.
마당에 작은 동그라미들이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하면 누군가 “비 온다!”는 외침에 비설거지 하느라 집안사람들은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야단이 났다. 여우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은 널어놓은 빨래나 곡식멍석 생각에 밭에서 일하다 말고 맨발로 뛰게 만들기도 했다. 그렇게 맑은 날에 잠깐 오다 마는 여우비나 소낙비는 종종 사람의 혼을 빼놓았다.
늦장마가 시작되기 전이었다. 더위를 피해 이른 새벽에 참깨를 베러 갔다. 남편이 참깨를 베고 나는 베어 놓은 참깨를 단으로 묶어 경운기에 실었다. 온몸은 이미 땀에 푹 젖어버렸지만 잠시도 쉴 수가 없었다. 서쪽에서 밀려오는 구름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일찍 서두르고 손발을 분주하게 놀릴 덕분에 참깨를 다 베어 경운기에 옮겨 실을 수 있었다. 일하는 우리 부부를 보며 참고 있었던 것처럼 그제야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시커먼 구름이 온 하늘을 다 뒤덮고 큰 천둥소리는 마치 하늘이 쪼개지는 것 같았다.
남편이 경운기 시동을 켜 나는 경운기 짐칸에 냉큼 올라탔다. 수북한 참깨 단이 흔들려 무너지지 않도록 눌러 주어야 했기 때문에 위험해도 어쩔 수가 없었다. 바람과 함께 빗줄기는 점점 굵어졌고 나는 참깨 단 위에서 잔뜩 겁에 질려 엎드려 있었다. 땀에 절었던 옷은 빗물에 젖고 벌겋게 달아올랐던 얼굴은 빗물에 시원하게 씻겼다. 앞만 보고 급하게 달리던 남편이 뒤를 돌아봤다. 나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얼떨결에 나도 따라 웃었다. 힘든 일을 함께 해냈다는 뿌듯함과 서로를 걱정하는 애틋한 마음이 통했을까. 우리는 쏟아지는 장대비를 흠뻑 맞으면서 말없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시커먼 기미 같은 먹구름이 온통 하늘을 뒤덮고 있었는데 비가 내리면서 서서히 걷혀갔다. 뜻하지 않게 갑자기 찾아오는 소나기처럼 때론 젖는 줄 모르게 조용하게 내리는 가랑비같이 사랑도 행복도 그렇게 느껴지는 것 같다.
사정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따라 가느라 몸도 마음도 지쳐 있을 때 비오는 날은 내게 잠깐 멈추고 쉬라고 한다. 정신없이 달려온 길을 돌아보라고 비가 내린다. 잊고 지낸 추억을 떠올리며 미소 지으라고 비가 내린다. 삭막해져 가는 메마른 내 정서를 촉촉이 적셔주기 위해 비가 내린다. 그래서 나는 비 오는 날을 좋아한다.
조우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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