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과비평 2013년 7월호, 사색의 창] 만경강의 아침 - 정곤
"“사내가 시시하게 …….” 바람이 문짝을 흔들며 지나갔다. 지금 생각해보아도 고모의 가슴을 얼마나 답답하게 만들었을까. 철없던 생각, 울고 싶던 생각, 내 건방진 생각이 자꾸 떠오른다. 반세기가 지나 속내를 이야기를 하고 싶어도 고모는 이승에 없다. 잠이 오지 않는 새벽이면 만경강의 아침이 보인다. 그때 내 모습이 불현듯 나타나 속을 태운다."
만경강의 아침 - 정곤
인기척을 듣고 부엌에서 나오던 고모는 내 손을 잡고 만경강 닮은 표정으로 손님을 맞이한다. 강은 삶처럼 부지런하고 활기차다. 강은 느린 걸음을 걸으면서도 사람처럼 요란스럽고 부산을 떨지 않고 순리에 맞게 이야기하며 걷는다.
만경강은 원등산과 운장산, 만덕산에서 발원하여 호남평야의 중심을 지나 서해로 흘러간다. 전형적인 곡류하천曲流河川으로 가축의 분뇨, 흙탕물, 공해에 찌든 실개천이 객담처럼 뱉어져 늘 괴롭힌다. 그렇다고 불평을 하거나 욕심을 부리지 않고 투정을 하지 않으며 쓰다듬고 다독인다. 그리하여 포용하고 인내하여 말없이 그들을 희석함으로써 평등하게 만든다. 물소리를 가만히 듣고 앉아 있으면 속세와 자연과 내 마음을 이어준다. 그 소리는 아름다운 선율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은 소리가 있다면 어쩜 그것은 물 흐르는 소리다. 먼지 하나가 떨어져도 들릴 것 같이 고요하다. 갈매기 울음소리를 듣고 잠을 깬다. 강은 가진 것이 별로 없는 이들의 삶과 닮아 부대끼며 사는 것에 이골이 나 있다. 고모처럼 교육 한 번 제대로 받아 본 적 없어도 탓하지 않는다. 그래서였을까. 노자의 상선약수上善若水를 배우지 않아도 스스로 안다. 그렇다고 일평생 허리 한번 제대로 펴지 못하고 밤이라도 편안하게 잠자리에 들어야 하는데 그마저 여의치 않다. 그 흔한 쌀밥도 먹지 못하던 시절과 흉년에 모진 생명을 유지하며 살아왔다. 대처에 나가 큰돈을 벌어 본 적이 없는 고모는 늘 도회지에서 사는 꿈을 버리지 않고 동경하곤 했다. 강도 그곳을 떠나 산 적은 없었다. 그렇듯 변화의 물결 따라 자신을 부정하는 사람이 더러 있다 하여도, 오직 변하지 않고 산다는 것이 대견스럽다.
얼마 전, 읽었던 책 첫머리를 다시 뒤적거리듯 강바닥에 살고 있는 조그만 생명의 발자국을 보았다. 생명은 그곳에서 자란 흔적을 글로 써서 자연의 역사를 만든다. 그 역사 속에 사는 것이 생명의 고향이듯 내 고향도 그곳이다. 배의 밑바닥이 갯벌 위에 알몸을 드러내고 썰물과 밀물을 기다리듯 자연은 새로운 법칙을 가르쳐준다. 맨발로 방천길을 걸으며, 비를 맞고 낚시를 하면서 자연과 함께 살고 싶을 때가 있었다. 다랑이 논에서 새 물이 흘러내리면 그곳에 우렁이의 느릿한 여유가 있다. 금방 친해질 것 같은 물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낚시를 한 적이 있었다. 그렇게 강은 언제고 곰삭은 김치처럼 한입에 넣고 막걸리 한 잔 목을 축이듯 누구나 친해진다. 나는 잔에서 막걸리가 흘러넘칠 정도로 웃으며 자연을 즐겼다. 음악이 없어도 물소리가 있어 흥이 나고, 들새의 지저귐 또한 강을 풍요롭게 만들었다. 맨발을 벗고 다녔던 하루, 풀 아래 진흙을 밟으면 미끈한 냉기가 발밑에서 올라왔고 해는 서산에 기울었다.
강물을 바라보며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인간이 버린 공해에 숨을 쉴 수 없다고 아우성치는 생명들의 신음소리를 듣는 것 같아서다.
어느 여름방학 때 무작정 버스를 타고 고모를 찾아갔다. 학교 문제로 누구와 툭 터놓고 이야기를 할 수 없어 고모를 찾아갔다. 그런데 막상 고모를 만나는 순간 마음이 바뀌었다. 고모와 나는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내 심정을 아는 눈치였다. 그저 쳐다만 보고 있다가 보리밥에 시원한 우물물 한 그릇을 가지고 왔다. 된장에 생고추를 꾹꾹 찍어 물에 말아 후륵후륵 마시면서 먹었다. 시장한 나는 허겁지겁 보리밥을 먹으며 뜨겁게 달구어진 여름날 오후를 식히고 있었다.
시커멓게 그을린 오두막집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사내가 시시하게 …….” 바람이 문짝을 흔들며 지나갔다.
지금 생각해보아도 고모의 가슴을 얼마나 답답하게 만들었을까. 철없던 생각, 울고 싶던 생각, 내 건방진 생각이 자꾸 떠오른다. 반세기가 지나 속내를 이야기를 하고 싶어도 고모는 이승에 없다. 잠이 오지 않는 새벽이면 만경강의 아침이 보인다. 그때 내 모습이 불현듯 나타나 속을 태운다.
정곤 -----------------------------------------------
≪수필과비평≫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