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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 2013년 7월호, 다시 읽는 좋은수필] 해바라기 - 고봉진

신아미디어 2013. 9. 6. 08:04

"그러나 내 뇌리에 어른거리는 것은 여전히 그 옛날의 청초한 소녀 모습뿐이었다. 해바라기를 열심히 그리던 단발머리 소녀의 모습이 잠시 어렴풋이 떠올랐다. 좀 더 확연한 상像을 잡으려고 지그시 눈을 감고 옛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나 그녀의 뚜렷한 모습은 도무지 떠오르지 않고 엉뚱한 사람의 모습이 짓궂게 그 앞을 가로막았다."

 

 

 

 

 

 해바라기     /  고봉진


   중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여름방학이 되자 속리산 속에 있는 어떤 한적한 마을을 찾아가게 되었다. 산마을에는 외할머니가 살고 계셨다.
그런 시골까지는 정기 노선 버스가 다니지 않던 시절이다. 증기기관차가 이끄는 무개 화차를 타고 일단 상주 읍까지는 잘 갔으나, 그다음부터는 차편을 얻기가 몹시 어려웠다. 하는 수 없이 그 마을 장날까지 며칠을 기다려서, 장꾼들이 세를 내어 몰고 들어가는 짐차 하나에 겨우 편승하게 되었다.
   장마철이었다. 그날도 하늘은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떠나겠다는 시간이 지났는데도 하주荷主들은 출발을 망설이기만 하였다. 나는 짐 더미 위에 올라앉아 초조하게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한 시간도 더 지체한 끝에 날씨가 좀 갤 기미를 보였고, 그제서야 짐차는 시동을 걸기 시작하였다. 그때 한 여학생이 달려와 가까스로 내 옆자리에 앉았다. 나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아름다운 소녀였다. 차가 제시간에 떠나지 않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녀는 커다란 캔버스와 이젤을 들고 있었다.
   백 리가 넘는 험한 산길을 달리는 동안 우리들의 짐차는 퍼붓는 비를 두 번이나 만났다. 그때마다 차는 멈추었고, 사람들은 길갓집 처마 밑으로 들어가 비가 멎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 시간이 지루하거나 짜증 나지 않고 오히려 즐거웠다.
   나는 한 번도 소녀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했고, 말을 걸어 볼 숫기는 더욱 없었다. 그저 가까운 산봉우리들 사이로 느릿하게 움직이는 비구름과 낡은 초가지붕에서 세차게 떨어지는 황갈색 낙수를 지켜보면서 속으로만 들떠 있었다.
   우리의 목적지인 시골 장터에 도착했을 때에는 파란 하늘이 구름 사이로 조금씩 보이고 있었다. 차에서 내린 우리들은 인사 한마디 없이 헤어지고 말았다.
   그 뒤 일주일 동안 나는 그 마을에서 꿈과 같은 나날을 보냈다. 외할머니를 뵈러 간 주제에 할머니 곁에는 잠시도 붙어 있지 않고, 밥만 뚝딱 해치우고 나면 부랴부랴 밖으로 뛰어나왔다. 행여나 그 소녀를 만날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희망을 안고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때로는 책을 들고 늙은 밤나무들이 우거진 숲 속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기도 하였다. 그곳에는 맑고 깊은 개울이 흐르고 있었고, 여기저기 덤불 속에 이름 모를 들꽃들이 피어 있었다. 소나기처럼 줄기찬 매미 소리를 귓전에 들으면서 나는 줄 사람도 막연한 꽃다발을 한아름씩 만들곤 하였다.
   해가 기울면,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고갯길로 올라갔다. 저녁 연기가 집집마다 피어올랐다. 피를 토하는 듯한 울음을 울며 까마귀가 붉은 노을이 짙게 물든 서쪽 하늘을 향하여 날아갔다.
   어둠이 내리면 산골은 안개가 자욱했다. 개구리 소리만 요란한 짙은 회색 장막 저쪽에서 이따금 반딧불이 희미하게 나타났다가 이내 사라지곤 하였다. 나는 보일 듯 말 듯 어렴풋이 서 있는 가로수를 따라서 마을로 발길을 돌렸다.
   마을 어귀에는 초가로 된 교회가 있었다. 열린 창문으로 램프의 흐린 불빛과 함께 마을 사람들의 기도 소리가 조용히 흘러나왔다. 나는 교회 밖에서 그 속에 소녀가 있으리라는 막연한 기대를 품고 한동안 서성거리다가 결국 아무런 시도도 해보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왔다.
   어느 날 오후, 텅 빈 국민학교 교정 한구석에서 나는 그녀를 보았다. 소녀는 껑충하게 서 있는 해바라기를 열심히 그리고 있었다. 먼발치에서 그녀의 모습을 발견한 순간, 나는 오히려 당황해서 발꿈치를 돌리고 달아났다. 그리고 나서 곧 후회를 하며 그러한 자신에 대해서 실망과 좌절감을 느꼈다.
   산마을을 떠나서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곳에서 보낸 나날이 꿈속에서 경험한 세계처럼 아련하고 신비스럽게 느껴졌다. 나는 오랫동안 산속에서 잠을 자고 돌아온 리프 반 윙클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세상이 온통 변한 것 같았다. 나는 무엇인가 크게 결핍된 듯한 막연한 불만감에 사로잡혔고, 그때까지 중요한 것으로 여겨 오던 주변의 일들이 모두 시시하고 서글프게만 보였다.
   근년에 우연히 그 소녀의 이야기를 다시 들을 기회가 있었다. 새로 가정부로 들어온 아주머니가 마침 그 산마을 출신이었던 것이다. 여러 가지로 궁금한 점이 많았으나, 노골적으로 관심을 표명하고 꼬치꼬치 캐물을 처지는 아니었다. 다만 단편적인 정보를 조금씩 얻어낸 것이 고작이었는데, 아주머니가 전한 것은 성숙한 부인으로 시골서 유복하게 살아가고 있는 그녀의 이야기였다.
   그러나 내 뇌리에 어른거리는 것은 여전히 그 옛날의 청초한 소녀 모습뿐이었다. 해바라기를 열심히 그리던 단발머리 소녀의 모습이 잠시 어렴풋이 떠올랐다. 좀 더 확연한 상像을 잡으려고 지그시 눈을 감고 옛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나 그녀의 뚜렷한 모습은 도무지 떠오르지 않고 엉뚱한 사람의 모습이 짓궂게 그 앞을 가로막았다.

 

 

고봉진  -----------------------------------------

   고봉진님은 1938년 출생 대구에서 자람. 서울대학교 문리대 철학과 졸업. 한국일보 멀티미디어 대표이사. 계간 『철학과현실』자문위원. 민영통신사 ‘뉴시스’ 상임고문(2009년~현재), 『계간수필』발행인(2010년~현재), 종합잡지 『세대』에 수필 「등산」 발표 (1971년) 후 각 지면에 단속적으로 각종 산문, 칼럼 집필, ‘현대한국수필문학상’ ‘현대수필문학상’ 수상(1992년), 수필문우회  회장(2010년~현재), 문집 :  『향수여행』(1992년), 『굴뚝』(2007년), 『묘적암』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