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수필과 비평/수필과비평 본문

[수필과비평 2013년 7월호, 사색의 창] 바람개비 - 고해자

신아미디어 2013. 9. 5. 08:09

"필시 기다리던 봄일 텐데 반가움도 찾아볼 수 없고 시장을 향할 때의 짐보다 훨씬 줄어든 귀갓길 역시 적잖이 짐꾼을 자처한 어머니. 초췌하여 지쳐있는 듯하지만 체구가 아담해서일까 등이 굽지 않은 것만도 대단해 보인다. 몸 하나 지키는 일도 어려울 텐데 철칙인 듯 밴 조냥정신*은 잊혀진 제주 어머니의 전형을 보는 듯하다. 자신의 건강은 뒷전이라 몸 사리지 않고 제자리를 지켜가는 분. 연로하신데도 자식에게 폐 끼치지 않으려 노동 중인, 자식을 그리며 그들을 위해 가슴으로 아파해준 마른 들꽃 같은 존재, 팔순 초입 노모의 몸의 언어를 깊게 듣는다."

 

 

 

 

 바람개비     -  고해자


   시냇물 소리처럼 끊임없이 재잘대는 아기 앞에 엄마만큼 진지한 눈길이 또 있을까.
   샤갈의 작품 <모성애>에 눈길이 오래 머문 적이 있다. 아기 엄마가 눈부신 빨강 원피스를 입고 걸터앉아 팔꿈치의 힘으로 벌거숭이 같은 아기를 받치고 있다. 허벅지 위에서 노는 아기를 슬며시 안고 있는 모습이다. 게다가 시선은 허공을 향해 있어 본인의 과거와 현재, 미래까지 넘나들고 있는 표정에 그 까닭모를 꼬리가 부럽기만 하다. 아기를 보듬는 일보다 환상에 젖어드는 아우라를, 어머니로서보다는 파도타기 같은 자신의 벽 앞의 생을 더 우선시하는 것만 같다. 아기의 미래는 바람개비로나 지켜주고, 기다려주려는 주관들로 가득 차서일까. 단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자기 생을 밀어 올려 상생을 위해 의연히 나래를 펼치는 서구적 모성애를 한가득 본다. 사랑의 지평이 달라서일까. 자애로운 어머니의 기도는 아이의 마음이 부자이기만을 기원할 뿐 맹목적으로 치닫지 않아 함께하나 다름을 본다. 소용돌이의 일생을 살아낼 시선이기보다, 한 송이의 꽃을 피우기 위해 깃들어야 할 것들을 알기에, 눈을 더욱 동그랗게 치켜뜨며 자신의 미래와 행복을 셈하는 장면의 순간이다.
   그날 따라 버스에 승차하는 입구 쪽에서 요란스런 쇳소리가 들린다. 주인보다 녹슨 손수레가 떠밀리듯 버스에 먼저 오르고 있다. 버스 안이 들썩일 만큼 고단함을 감추지 못함이던지 뒤따르던 수레의 주인이 등장하던 상황이 슬며시 끼어든다. 세월의 더께를 걸친 결코 가볍지 않은 짐들의 울림 또한 좀체 희미해지지 않아서다. 굳어가는 손가락 끝의 감각이거나 전신을 파스로 도배할 관절들에서 과연 자유로운 노인일까. 할머니의 오랜 일상이 습관처럼 버스로 향하는 건 아닐지. 불편한 심기는 표현하지 않을 뿐 언젠가 좋은 날이 찾아오리란 기대 속에 시련조차 향유하고 있지 싶다.
   시간이 지날수록 할머니의 일상이 버거워 보임은 왜일까. 오일장날마다 채소 보따리 채워 등에 지고, 꽉 채운 손수레 끌며 나가 노을을 배경으로 탄 차안, 노모의 귀갓길이 아리다. 파랗고 큰 플라스틱 바가지를 엎어 진지하게 싼, 감색 보자기 안은 접힌 빈 종이박스들이 동행하고 한 귀퉁이의 재활용 비닐봉투 조합까지 저들끼리 구시렁댐이 한창이다. 큰 바가지로 갈무리 된 비어있는 것들의 고단함 또한 물씬하다. 보자기를 늘려 쓰느라 네 모서리마다 덧댄 하얀 비닐 끈들은 하늘타리의 꽃 갈래보다 더 가늘어 내색 않는 야무진 매무새이다. 하루 이틀의 솜씨가 아닌 평생 밴 능숙함이다. 저 연세에 무슨 생각을 하며 오가는 길목일까.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진심을 다해 푸성귀 포기들과 대화를 나누고 가뭄에 씨 뿌리듯 그들을 배웅하고 오는 길일까.
   장날마다 긴 기다림 끝의 마수걸이가 될 때의 설렘, 그 날아갈 듯한 기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즐거움의 시작일 터다. 솔방울보다 까칠한 손에서 무성해지는 따뜻함을 알기에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아 하루를 데우는 귀한 손길이다. 오일장날마다 이른 새벽과 해거름 경계에서의 달음질, 위태위태하지만 홀로서기의 승리일까. 대체 저 건강함은 어디에서 오는 저력일까. 건강 나이만큼은 지속하는 일로 인해 장날마다 늘 자유인이다.
   길가의 조숙한 벚꽃송이들조차 고성을 지르나 보다. 저들도 혹독한 꽃샘추위에 바람막이를 찾는 듯하다. 고르지 못한 날씨 탓에 남들보다 유달리 두터운 스웨터를 겹겹이 챙겨 입은 어르신, 추위를 보듬기 위한 나름의 전략임이 여실하다. 버스에서 내릴 즈음 보자기 아래서 새우잠 청하던 수레가 투덜대며 서너 번 구르더니 하차할 입구에서 멈춘다. 필시 기다리던 봄일 텐데 반가움도 찾아볼 수 없고 시장을 향할 때의 짐보다 훨씬 줄어든 귀갓길 역시 적잖이 짐꾼을 자처한 어머니. 초췌하여 지쳐있는 듯하지만 체구가 아담해서일까 등이 굽지 않은 것만도 대단해 보인다. 몸 하나 지키는 일도 어려울 텐데 철칙인 듯 밴 조냥정신*은 잊혀진 제주 어머니의 전형을 보는 듯하다. 자신의 건강은 뒷전이라 몸 사리지 않고 제자리를 지켜가는 분. 연로하신데도 자식에게 폐 끼치지 않으려 노동 중인, 자식을 그리며 그들을 위해 가슴으로 아파해준 마른 들꽃 같은 존재, 팔순 초입 노모의 몸의 언어를 깊게 듣는다.
   요즘의 나는 넘어지고 나서 왼쪽 팔목 골절로 깁스를 하고 다닌다. 한쪽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다른 한쪽도 온전해야만 서로 의지하며 상생한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는다. 고통과 행복 역시 늘 함께 존재하는 것이기에 엇박자의 시련을 감사하게 받아들이기로 한다. 깁스를 간신히 면했던 팔 역시 숟가락 들기도 힘들었던 때로 인해 마음 챙김도 흘러가는 시간 앞에 늘 지각이다.
   그림 감상하는 내내 그림 속 모성애에 뒷걸음치는 낯빛의 그림자로, 전날 시장 다녀오던 노모의 마음 시리게 다녀갈까.
   흔들리는 노을을 지고 온 바람개비 하나 미세하게 떨린다.

 


* 조냥정신: 근검·절약정신을 가리키는 제주도 특유의 생활정신이자 제주어이다.

 

 

고해자  ------------------------------------------

  ≪수필과비평≫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