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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비평 2013년 7월호, 세상마주보기] 감자골 향기 - 라성자

신아미디어 2013. 8. 20. 07:56

"제가 모진 일을 겪고 암울한 터널에서 헤매고 있을 때, 우울증이 찾아와 자기와 동거하자고 꼬드겼습니다. 마음이 허황하면 그 틈새를 노리는 부정한 것들이 유혹을 합니다. 그때마다 당신께서 보내준 따뜻한 편지가 저를 품어주었습니다. 당신께서 보내준 글 중에 지금도 잊히지 않는 대목은 “그 또한 지나갈 것이다.”입니다. 제게 큰 위로가 되었지요. 지금은 반사체가 되어 당신께 되돌려 주렵니다. 학교 선후배 사이를 넘어 우리는 서로가 느끼는 정서의 주파수가 동일하기에 좋은 일도 궂은 일도 함께 나눌 수 있었습니다."

 

 

 

 

 

 

 감자골 향기     -  라성자


   산 아래 감자꽃이 환하게 피었다고 전화통 너머 들려오는 선배 목소리에 감자꽃 향기가 묻어옵니다.
   산청읍 내리마을 감자밭이 많아 감자골인가 그 골짜기로 들어간 지도 어언 몇 년이 흘렀습니다. 의사도 손 놓은 환자를 모시고 산동네로 피접을 떠났지요. 산으로 들로 다니며 약초를 캐어다 즙을 내고 달이고 정성을 쏟으면서. 기적 같은 요행을 바라고 민간요법에 매달렸다고 합니다. 선배의 반려伴侶는 초등학교 교편생활을 천직으로 알았던 샌님 같은 분이셨지요. 잇속에 밝지 못하고 요령부득인 측에 속하는 성실한 인물인데도 신께서는 냉정했습니다. 당신의 어떤 노력도 애타는 기도도 명命 잇기에는 역부족이었나 봅니다.
   ‘함께’란 관계에서 ‘혼자’라는 외로운 자리에 돌아온 당신께 알맞은 위로가 떠오르질 않습니다. 마음속으로 깊은 신열을 앓고 폐광 같은 적적함으로 수척해 있을 당신을 차마 마주할 수 없어 시간만 죽이고 있음을 헤아려 주리라 믿습니다. 사십여 성상을 함께한 당신을 남겨두고 요단강을 건넜을 그분도 발걸음이 가볍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삶의 행간에서 튕겨나가고 싶다는 기막힌 말을 소리통을 통해 듣는 순간 내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당신의 여린 심성에서 어찌 막다른 말이 나오는지. 한 생을 바쳐 살아온 것들이 한바탕 웃고 떠들고 마는 농담 같은 세월은 결코 아님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바람이 불지 않아도 제물에 흩날리는 꽃잎을 보면서 허무를 느끼지 않는 자 몇이나 되겠습니까. 이미 우리가 건너온 흔적은 두꺼운 이끼로 덮여 있는 여정의 말미에 서 있습니다. 노년의 적적함을, 기우는 생의 쓸쓸한 비애를, 생명을 품은 대지에 기대어 마음의 평화를 얻으라고 당부 드리고 싶습니다.
   꽃이 지는 슬픔과 아픔의 자리에 열매가 열린다는 지극히 평범하고 상식적인 섭리를 벗어나 땅속에 열매를 감추고 키워내는 감자의 속내를 알 수는 없지요. 봄철 또 여름철이란 길고 긴 세월을 거친 다음에 자신을 드러내는 식물의 한생애도 신이 점지해 놓은 오묘한 철학적(?)인 의미가 숨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어떤 일을 시작도 하기 전에 나팔소리 요란한 사람살이에 새겨야 할 대목도 있는 것은 아닌지 혼자 생각해 봅니다.
   무위도식에 스스로 부끄러워서가 아니고 살아있음의 징표로 몸을 움직일 일거리를 찾는다면 정서적 안정감을 얻을 것입니다. 용도폐기로 분리되지 않으려면 무엇인가 취미 삼아 그 일에 묻혀야 합니다. 감자밭에 나가 잡초도 뽑고 알맹이가 얼마만큼 굵어졌을까 기다리는 법과 참는 법을 새삼 자연에서 터득하십시오. 주어진 삶을 걸러내고 조금은 헐렁하게 사는 것도 한 방편이 아닐는지요. 복잡한 세상사 모르는 체 살아가는 단순함도 때로는 위안이 됩니다.
   이미 오래전 일입니다. 제가 모진 일을 겪고 암울한 터널에서 헤매고 있을 때, 우울증이 찾아와 자기와 동거하자고 꼬드겼습니다. 마음이 허황하면 그 틈새를 노리는 부정한 것들이 유혹을 합니다. 그때마다 당신께서 보내준 따뜻한 편지가 저를 품어주었습니다. 당신께서 보내준 글 중에 지금도 잊히지 않는 대목은 “그 또한 지나갈 것이다.”입니다. 제게 큰 위로가 되었지요. 지금은 반사체가 되어 당신께 되돌려 주렵니다. 학교 선후배 사이를 넘어 우리는 서로가 느끼는 정서의 주파수가 동일하기에 좋은 일도 궂은 일도 함께 나눌 수 있었습니다.
   비 오는 날이면 감자전을 부치고, 햇살 좋은 날은 밭에 나가 김을 매면서 사념에서 벗어나십시오. 밤이면 별이 쏟아지는 뜰 아래 살구가 노오랗게 익어 단물이 고이겠지요. 도시에선 상상도 못할 호사지요. 자연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 품에 안겨 느끼는 맛은 넉넉한 엄마 품만 같다고 하던 선배의 말, 기억하고 있습니다. 소금보다 짠 인생살이 강물에 던져 버리고, 나뭇잎 팔랑거리는 바람과 더불어 사유하며 아득하게 느껴오는 산찔레 내음으로 시름을 잊으세요.
   감자꽃이 지고, 또 긴 여름을 보내고 주먹만 한 감자를 캘 무렵 선배가 좋아하는 간고등어 몇 손과 우리 둘이서 몰래 즐기던 와인 한 병 가방 속에 넣고 감자골로 가겠습니다. 그때쯤이면 선배의 눈물자국도 말랐을 것이고 밝아진 얼굴로 살구나무 아래에서 은하수 안주 삼아 잔을 부딪쳐 볼 것입니다.
   감자꽃 향기마저 감추고 인내하는 당신께 흔들림 없는 그리움을 띄웁니다.

 

 

 

라성자  ----------------------------------------------
   ≪수필과비평≫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