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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비평 2013년 6월호, 세상마주보기] 물에서 배우자 - 현임종

신아미디어 2013. 8. 15. 10:26

"높은 산에 내린 비가 방울방울 모여 옹달샘처럼 졸졸 흘러 그 물이 넓은 강으로 흘러오기까지는 실 같은 좁은 길을 찾아 헤매며 흘러온다. 틈만 있으면 흘러 들어가는 물의 섭리를 보며 많은 허점을 드러내고 살아가는 우리 인간도 빈틈을 메우듯, 어려움 많은 구석구석을 돌아보며 살아가야겠다는 정신을 깨우쳐 준다. 목마름을 해결해 주고, 더러운 곳을 씻겨 주며 화재의 위험에서 구해줄 뿐 아니라 묵묵히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물의 처신에서 우리가 배울 점을 깨달아 갈 일이다"

 

 

 

 

 

 

 물에서 배우자    -  현임종


   나는 제주도 중산간지역 노형마을에서 태어나 구릉물(봉천수)을 먹고 자라면서, 해안가에 사는 사람들이 산물(지하수)을 마시는 것을 무척 부러워했었다. 봉천수에는 개구리, 뱀, 장구벌레 등이 우글거렸다. 그래도 그 물을 길어다가 항아리 가득 채워놓고서 떠서 마시고, 밥도 지어 먹었지만, 그 시절에는 위생상의 걱정은 별로 해 본 일 없이 지냈다.
   그래도 무더운 여름날이면 해안가 마을인 도두리의 <오래물>에 가서 냉수욕도 하고, 시원한 산물을 마셔 보고는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복 받은 사람들이구나.’ 하고 생각하곤 했다. 그런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상수도 시설이 완비되어 봉천수 구릉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 봉천수 물을 마시고 자란 세대도 함께 사라져 가고 있다.
   오래전에 우리나라의 지하수 수맥에 관한 연구를 하는 어떤 분이 해 주신 말씀이 “한라산 정상에 내린 빗물이 지하로 스며들어 서귀포로 흘러갔다가 제주도를 동회전으로 감아 돌아서 제주시 산지천까지 도달하는 형태로 흘러오고 있는데, 대략 그 기간이 30년 정도 걸리니, 얼마나 자연정화가 잘 이루어진 물이겠습니까?”라고 하셔서 깜짝 놀란 일이 있다. 그렇다면 산지천에서 샘솟는 물이 30년 전에 한라산에 내린 빗물이란 말인가.
   과학적으로 입증된 말인지 아닌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믿기 어려운 말이었지만, 사실이 그렇다면 요즘처럼 지하수를 경쟁적으로 퍼 올리고, 팔아먹기에 정신을 못 차리는 세태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은 지하수가 고갈될 날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과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공장에서 상품생산하듯 마구 찍어내지 못하는 것이 물이고 보면, 좁은 땅 제주에 내리는 빗물만으로는 감당할 수가 없을 것 같다.
   아메리카 대륙이나 북유럽을 여행하며 드넓은 호수와 장관을 이루는 폭포들을 많이 보았다. 그곳에 사는 사람은 물 걱정은 안 해도 되겠구나 하고 느낀 바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이 작은 땅 제주도에 지하수가 무한정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게다가 우리보다 물이 풍족한 이런 나라들조차도 물을 파는 장사에 우리만큼 열을 올리지는 않고 있다. 30년 뒤 후손이 마셔야 할 물을 오늘날 우리가 내 것인 양 여기며 함부로 소비하고 있지는 않나 생각해 볼 일이다.
   이왕에 물 이야기가 나왔으니, 물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을 되새겨 보자. 인간은 물론이요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물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도 정작 우리는 그 중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하며 심상하게 지내고 있다. 물로 음식을 만들어 먹고, 목마르면 물을 마시고, 아침 저녁으로 물로 세수하고, 목욕탕에서는 물로 때를 씻어내면서도 물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이집트의 시나이 산을 오르면서 우리나라에서라면 귀찮을 정도로 널려 있을 잡초 한 포기조차 구경할 수 없었다. 강수량이 워낙 적기 때문에 물이 없어 풀 한 포기도 자랄 수가 없는 것이다. 식물도 물이 없으면 존재할 수가 없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었다.
   내가 어렸을 때 제주에서는 한라산에 가축을 방목해 키웠다. 드넓은 한라산에 소와 말을 풀어 놓아도, 그들은 자기가 태어난 곳 가까운 물가를 떠나지 않고 맴돌며 머물러 잃어버리지 않기에 방목이 가능했던 것이다. 모든 동물도 물을 떠나 살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물은 우리에게 생명수이고 물 없이는 못 산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다. 무더운 여름날 밭에서 땀 흘리며 일하던 사람이 차가운 물로 세수하고 몸을 씻을 때 느끼는 상쾌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시원하다. 물은 더러운 것을 씻겨주는 정화수임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물 없으면 지저분한 우리 주변을 깨끗하게 청소할 수도 없고, 더러워진 우리 몸도 깨끗하게 만들 수가 없을 것이다.
   물은 소방수 역할로 우리를 불의 위험으로부터 구해주는 중요한 일도 맡아준다. 화재가 발생하면 소방차가 달려와 물을 뿜어 불을 진압해 주는데, 이때 물의 역할이 얼마나 소중한지 다시금 일깨워준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비가 모여 물이 되고, 물이 넘치면 홍수가 되어 간혹 수재水災를 일으키기도 하지만, 이는 치수治水로 해결할 일이다. 다만 물이 지니고 있는 역할도 중요하지만, 물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깊은 뜻을 새겨볼 일이다.
   물을 보라! 물이 높은 산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을 상상할 수가 없다. 물은 높은 데 머물러 있기를 거부하고, 낮은 곳으로 흐르고 흘러 내려가 호수나 바다에서 수평을 이루고 머문다. 잔잔한 호수나 대야에 떠놓은 물을 들여다보면, 높고 낮음이 없이 수평을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바람에 의해 물이 출렁거릴 때도 있지만, 곧바로 수평을 유지하는 것이 물이다.
   도토리 키재기 하듯 아우성치며 살아가는 우리, 높은 곳만을 쳐다보고 살아가는 인간에게 낮은 곳으로 흘러가서 수평을 유지하는 물은 무언의 가르침을 안겨주고 있다.
   높은 산에 내린 비가 방울방울 모여 옹달샘처럼 졸졸 흘러 그 물이 넓은 강으로 흘러오기까지는 실 같은 좁은 길을 찾아 헤매며 흘러온다. 틈만 있으면 흘러 들어가는 물의 섭리를 보며 많은 허점을 드러내고 살아가는 우리 인간도 빈틈을 메우듯, 어려움 많은 구석구석을 돌아보며 살아가야겠다는 정신을 깨우쳐 준다.
   목마름을 해결해 주고, 더러운 곳을 씻겨 주며 화재의 위험에서 구해줄 뿐 아니라 묵묵히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물의 처신에서 우리가 배울 점을 깨달아 갈 일이다.

 

 

현임종  -----------------------------------------
   ≪수필과비평≫ 등단. 저서: ≪보고 듣고 느낀대로≫, ≪(속) 보고 듣고 느낀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