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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비평 2013년 6월호, 세상마주보기] 어떤 약속 - 정영자

신아미디어 2013. 8. 15. 10:21

"비가 내리면 웅장한 폭포를 볼 수 있다더니……. 속은 느낌이 들었다. 한참을 마른 벼랑만 바라보다가 돌아서려는데, 수직의 바위 틈에 억척스레 달라붙은 초록의 식물이 눈에 들어왔다. 물길 따라 시간이 흐르는 자리에 키 작은 저것들은 어쩌자고 아찔한 낙하를 받아내고 있음인지. 무한 허공의 세상에서 저만큼 살아내려면 얼마나 많은 주저와 두려움을 견뎌내야 했을까. 삶의 이랑에 서서 무너질 듯 버티며 살아가는 나의 자화상이 겹쳐진다. 보는 자만이 보인다고 하던가. 비가 내리면 폭포를 볼 수 있다는 명제에서 벗어나니 비로소 폭포 이면에 존재하는 순리에 눈을 뜬다."

 

 

 

 

 

 

 어떤 약속    정영자

 

   기다리던 비가 내린다. 약속한 폭포 사진을 찍어야 하기에 길을 나섰다. 거세게 쏟아지던 비가 그치면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리는 폭포, 그 속성을 알기까지 몇 번의 시행착오를 겪었는지. 이곳을 처음 찾는 이들도 으레 거침없이 떨어지는 물줄기를 상상하며 찾아왔다가 허를 찔리는 곳이 바로 이 엉또폭포*다. 그렇다고 폭포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으랴. 용암이 만들어낸 거대한 기암절벽은 도도하게 하늘로 솟구쳐 침묵으로 일관한다. 물이 없어도 물을 볼 줄 아는 마음의 눈을 열라는 것인가.

 

   사진작가도 아니요 사진을 업으로 삼고 살지도 않으면서 폭포 사진을 꼭 찍어야 하는 데는 온라인상에서 한 약속 때문이다. 비가 내려야만 볼 수 있는 폭포의 비경을 소개하려는 취지에서 올린 글이었는데, 비가 오는 날이면 엉또폭포가 떨어지느냐고 관심을 보였다. 비록 익명의 사람들과 한 약속이지만 지켜야 했다. 약속은 대개의 경우 상대를 신뢰하는 데서 이루어지기에 그것은 관계형성의 기본 틀이라 생각한다.
   수많은 약속 중에서도 사람의 속을 보여 주는 건 돈하고 관련된 약속일 것이다. 십여 년 전, 사업을 하는 후배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돈을 빌려 주었다가 낭패를 당한 적이 있다. 비록 어려워서 약속을 못 지킨다 하더라도 ‘미안하다. 나중에라도 갚겠다.’라는 거짓 약속이라도 해주기를 바랐는데, 묵묵부답으로 버텨오다 끝내 종적을 감춰버렸다. 한동안 배신감으로 화도 나고 받지 못한 돈 때문에 속을 끓였다. 시간이 지나고 나니 후배에게 내가 모르는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알던 것이 다가 아니었기를 믿으며, 어디서 살고 있을지라도 잘 살았으면 싶다.
   폭포로 들어가는 길은 촉촉이 젖은 귤꽃 향기가 넘실거린다. 봄의 초입에 찾아 왔을 때 시원스레 떨어지는 폭포가 있어야 할 자리에 검회색 절벽만이 버티고 있었다. 비가 내리면 웅장한 폭포를 볼 수 있다더니……. 속은 느낌이 들었다. 한참을 마른 벼랑만 바라보다가 돌아서려는데, 수직의 바위 틈에 억척스레 달라붙은 초록의 식물이 눈에 들어왔다. 물길 따라 시간이 흐르는 자리에 키 작은 저것들은 어쩌자고 아찔한 낙하를 받아내고 있음인지. 무한 허공의 세상에서 저만큼 살아내려면 얼마나 많은 주저와 두려움을 견뎌내야 했을까. 삶의 이랑에 서서 무너질 듯 버티며 살아가는 나의 자화상이 겹쳐진다. 보는 자만이 보인다고 하던가. 비가 내리면 폭포를 볼 수 있다는 명제에서 벗어나니 비로소 폭포 이면에 존재하는 순리에 눈을 뜬다.
   폭포가 가까워질수록 바닥을 뒤흔드는 우렁찬 물소리가 시원하다. 이미 폭포 주변은 삼각대를 설치하고 카메라렌즈를 맞추는 눈빛으로 긴장감이 감돈다. 폭포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았다. 물안개 서린 주변으로 폭죽처럼 터지는 포말이 얼굴을 때린다. 모든 소리를 감싸 안고 떨어지는 포효가 위풍당당한 교향곡의 피날레인 듯 장엄하다. 찾아온 목적도 잊어버린 채 넋을 잃고 바라보는데, 문득 폭포 속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숨을 멈추고 셔터를 누른다.

 

 

* 엉또폭포: 한바탕 비가 쏟아져야만 볼 수 있는 폭포로 서귀포시 강정동에 위치.엉또의 ‘엉’은 작은 바위그늘이나 작은 굴을 말하고, ‘또’는 입구를 표현하는 제주어다.

 

 

정영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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