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과비평 2013년 6월호, 세상마주보기] 버려, 모두 버려…… - 이옥자
"요즘 나는 ‘버림’의 주술사라도 된 듯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버려, 모두 버려.”라고 말하며 다닌다. 일과 일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는 나에게 그 말을 속삭여주며 무엇이 허황된 일이고 무엇이 진정 자신을 위한 길인가 다시 생각해 본다. 이상만을 꿈꾸며 현실에서 떠나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잠시 지금의 상황을 잊어버리고, 얼마간의 시간을 보내버리라.”고 말한다. 거듭되는 오해로 멀어져가는 우정을 슬퍼하는 사람에게는 “어쩌면 인연이 다했을지도 모르니 그 친구를 이제 버려요. 그렇게 슬퍼하기보다 생각 속에서 잠시라도 지워 버려요.”라고 말했다."
버려, 모두 버려…… - 이옥자
나는 내가 싫다.
내 성격이 싫다. 좋은 것은 밝게 웃으며 선뜻 좋다고 말하지 못하고, 싫은 것도 쉽게 내색하지 못해 그럭저럭 따라가게 되는 나, 그러는 사이에 그것이 내게도 좋은 길이라는 자기 최면에 예속되어 스스로 주체성을 놓아버린 채 살아가는 나……. 사람들은 이런 어정쩡한 행동을 사려가 깊다거나, 생각보다 깍쟁이가 아닌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러나 대부분 본의 아닌 결정에 동의되고 마는 나를 보면 한심한 생각이 든다.
장날이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뒷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내 성적표를 꺼내 보이며 자랑하는 아버지 때문에 어릴 적 나는 성적에 민감한 아이답지 않은 아이로 자랐다. 결혼 후에는 ‘제사상을 잘 차린다’는 시댁어른의 한마디에 1년에 여덟 번 마련하는 차례상과 제사상에 온 정성을 쏟았다. 그러나 나의 수동적인 성격으로 보아 그것은 나 자신을 위한다기보다 아버지의 기쁨을 위한 공부였고, 조상을 기린다기보다 타인에게 보이기 위한 형식적인 행동이었던 것 같다. 그런 나의 행동들은 온유하고 모범적으로 보이나, 자신을 기만하고 자신에게 기만당하기도 하는 자가당착적인 면이 없지 않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있다. 칭찬은 모든 것을 가능케 한다는 의미지만, 나는 칭찬하는 사람의 노예가 된 것이 아니라 노예적 근성 때문에 스스로 칭찬의 분위기를 거부할 수 없는 길로 들어서서 자신의 아바타가 된 셈이다.
맺고 끊지 못하는 성격은 물건에도 마찬가지다. 버릴 것을 깔끔하게 정리해서 버리지 못하고 잡동사니 속에서 산다. 책은 세로 글씨에 노랗게 전 청소년기의 세계문학전집을 비롯해서 수십 년 전의 잡지며 레코드판, 전시회 도록까지 이곳저곳에 켜켜이 쌓여 있다. 낡은 청바지 하나, 색이 바랜 셔츠 하나 버리지 못해 옷은 옷대로 난장으로 쌓여 있다.
냉정해 보인다는 외양과는 달리, 끊어야 할 관계에도 선을 긋지 못한 채 추종追從을 융화라고 스스로 윤색하고, 하찮은 물건에조차 마음을 끊지 못하는 의지박약의 나는 인간의 기본적 자아함량 미달자인지도 모른다.
이런 나에게 조금 변화가 찾아온 것은 10여 년 전 가을, 그 말 때문이다.
그것은 심오한 가르침에 의한 것도, 내밀한 각성에 의한 것도 아니었다.
“버려, 모두 버려…….”
작은 바람처럼 조용히 스치던 그 한마디가 번개처럼 나를 일깨웠다. 그리곤 마치 샤먼의 주술인 양 지금도 나를 따라 다닌다.
그해 가을, 나는 혼자 그 작은 절을 찾았다. 좁은 산길을 돌아드는데 서리 맞은 들국화 한 무더기가 제 몸을 가누지 못한 채 쓰러져가고 있었다. 작은 계곡은 물이 마르고, 두어 채 농가의 늙고 비쩍 마른 개들조차 컹컹대며 몇 번 짖다 말았다. 몸도 마음도 지쳐 있던 나는 죽음을 직면할 듯이 시들어가는 풍광을 온몸에 새기며 그 길을 갔다.
절에 들어서니 바람이 세차게 풍경을 흔들며 낙엽을 휩쓸고 지나갔다. 천천히 법당으로 걸어가는데 요사채에서 스님이 나오며 반기신다. 우선 따뜻한 방으로 가자며 이끄는 스님은 우리 자매들과 가족을 친척처럼 생각하는 태고종의 노여승이다.
찻상을 앞에 두고 스님은 온화하게 미소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마주보며 웃고 있을 뿐이었다. 찻잔이 식어갈 즈음 스님이 일어서며 무심한 듯이 한마디 하셨다.
“버려, 모두 버려…….”
그리고는 앞서서 법당으로 향하셨다.
‘무엇을 버려야 할까요?’ 뒤따르며 물으려는 순간, ‘그래, 바로 그거지.’ 하고 내 가슴은 벌써 그 답을 말하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가에 늘어선 나무들은 빈 몸으로 바람을 맞고 있었다. 그렇게 찬란하게 빛나던 초록빛 잎들을 모두 벗어버리고 혼자 겨울을, 그리고 먼먼 봄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시 살기 위해서 모두 버린 나무-. 타인의 시선이, 허황된 칭송과 허명虛名이, 매일 죽어야 하는 내면의 소리들이 진실한 삶을 위해서 얼마나 거추장스럽고 고달픈 일이었을까.
어쩌면 나무는 어느 순간 지나간 계절을 생각하며 울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연둣빛과 노을빛 잎들의 아름다움이 아쉬워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눈물은 밖으로 흘러내림으로써 치유의 효능을 갖는다. ‘울어버린다’는 말은 ‘울어서’ 자신의 감정을 깨끗이 털어 ‘버린다’는 것, 그러기에 울음은 바로 지난날 자신과의 이별의 의식이 아닌가.
나무는 어처구니없이 행해지던 일들을 생각하며 슬며시 웃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허허 웃어버리며 누추한 감정들에 작별을 고했을 것이다.
조금 춥고 외로워도 꼿꼿이 서서 온몸으로 바람을 맞던 그 가을의 나무…….
요즘 나는 ‘버림’의 주술사라도 된 듯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버려, 모두 버려.”라고 말하며 다닌다.
일과 일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는 나에게 그 말을 속삭여주며 무엇이 허황된 일이고 무엇이 진정 자신을 위한 길인가 다시 생각해 본다.
이상만을 꿈꾸며 현실에서 떠나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잠시 지금의 상황을 잊어버리고, 얼마간의 시간을 보내버리라.”고 말한다.
거듭되는 오해로 멀어져가는 우정을 슬퍼하는 사람에게는 “어쩌면 인연이 다했을지도 모르니 그 친구를 이제 버려요. 그렇게 슬퍼하기보다 생각 속에서 잠시라도 지워 버려요.”라고 말했다.
며칠 전, 남도南道에 있는 교도소에 수감 중인 낯선 사람에게서 편지가 왔다. 절망뿐인 세월을 지내다가 얼마 전부터 일기를 쓰며 마음의 안정을 찾아 지금은 시와 수필을 쓰고 있다고 했다.
열심히 글을 쓰세요.
사람은 누구에게나 크고 작은 상처가 있답니다.
글을 쓰는 사이 서로간의 감정이 이입되기도 하고 감정의 완급이 조절되기에 그 상처가 치유될 수도 있더군요.
글로 모든 것을 써버리세요.
지난날도, 절망도 모두 버릴 수 있을 겁니다.
답장을 쓰며 나는 또 ‘버림’의 전도사가 되어, 어느 해 가을 나를 되찾게 해준 그 마법의 말을 건네고 있었다.
아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술술 자술서를 써내려가고 있었다.
이옥자 ------------------------------------------------
≪현대문학≫으로 등단. 수필집: ≪하얀 집, 그 여자≫ 외 5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