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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문학 2013년 창간호, 수필] 고도를 기다리며  - 김한분

신아미디어 2013. 8. 13. 14:43

"인터뷰에서 어떤 관객이 작가 ‘사뮤엘 베게트’에게 “고도씨는 누구입니까. 고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요”하는 질문에 “내가 그것을 알면 작품 속에 썼을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고도’는 누구인가. ‘디디’가 그토록 기다리는 고도는 어떤 존재일까. 신神, 구원, 사랑, 희망, 축복, 자유, 행복, 성공……. 기다림에 지쳐있는 ‘디디’의 저 모습이 우리의 모습으로 대치된다."

 

 

 

 

 

 고도를 기다리며    -  김한분

 

   20여년이 지난 지금, 지하철을 타고 택시를 바꿔 타면서까지 홍대 앞 소극장을 찾은 것은 왜일까. 얼핏 스쳐버린 친구가 아쉬워 외길을 다시 되돌아가는 심사 같다고나 할까.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보러갔다.
   솔직히 옛날에 이 작품을 보고는 크게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예술적 깊이를 음미하기에는 조예가 부족하기도 했겠지만, 썰렁하고 어두운 무대장치, 주인공들은 모자를 썼다 벗었다, 구두를 벗었다 신었다, 엉뚱한 대화는 짜증날 정도로 지루했다.
   기다리던 막이 오른다. 회색빛 배경과 높이 떠있는 무기력한 태양, 공허한 공간, 무대 중앙에는 그저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을 뿐이다. 나무는 마치 물음표(?) 형상의 모습으로, 얼핏 말라죽은 사막의 선인장(애리조나 언덕에서 본) 같기도 하고 그 기괴한 나무는 나에게 무엇인가 질문을 하고, 또 무슨 대답이라도 기다리는 것 같았다.
   마침내 권태롭고 탈진한 주인공 ‘디디’가 절룩이며 등장한다. ‘디디’는 나무 밑에서 발돋움을 하고 누군가를 기다린다. ‘디디’의 어릿광대 같은 몸짓, 옷차림, 말투로 이쪽으로 저쪽으로 목을 길게 하고 ‘고도’를 기다린다. 그때 포악한 정복자 ‘포조’가 수난자 ‘럭키’를 끌고 등장한다. 마침내 내 눈이 떠지고 귀가 그들에게 박히고 있음을 느낀다.
   ‘디디’가 기다리는 고도는 오지 않고 소년이 등장한다. ‘고도’씨는 언제 오느냐고 묻는다. 소년은 그저 담백하게 “모른다”고만 대답하고 어디론가 나간다. 한동안 극이 진행되고 소년이 다시 목자처럼 등장한다. 고도를 기다리던 또 한명의 주인공이 ‘고도’씨는 언제 오느냐고 묻는다. 소년은 또 “모른다”고 답하고는 멍하니 되돌아간다.
   인터뷰에서 어떤 관객이 작가 ‘사뮤엘 베게트’에게 “고도씨는 누구입니까. 고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요”하는 질문에 “내가 그것을 알면 작품 속에 썼을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고도’는 누구인가. ‘디디’가 그토록 기다리는 고도는 어떤 존재일까. 신神, 구원, 사랑, 희망, 축복, 자유, 행복, 성공……. 기다림에 지쳐있는 ‘디디’의 저 모습이 우리의 모습으로 대치된다.
   작가는 2차 대전 중 혐오스런 전쟁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며, 절망의 저편에서 누군가의 손길을 염원하며 이 희곡을 썼다고 한다. 아직도 이 작품이 많은 나라에서 관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저마다 구원을 찾으려는 목마름이, 공통의 숙제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산이 고향인 나는 방학 때마다 고향엘 갔다. 고향집에는 친구의 절망에 찬 편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친구는 함경도가 고향이다. 동란 중에 할머니와 식량을 구하러 나왔다가 피란민 대열에 끼어 가족과 헤어지고, 할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는 친구다. 힘들고 어려운 중에 간호대학에 합격하여 학비는 물론 숙식까지 제공받는 좋은 조건이었음에도 진학을 하지 못했다.
   병든 할머니를 돌보기 위하여 꿈을 포기하고 말았다. 친구는 나의 걱정을 위로 하듯이 담담한 답장을 보내왔다. -걱정 하지 마. 우리에게는 미래가 있지 않아……. 친구는 갈증을 다스리며 평생을 살아왔다. 그 친구의 편지 속 기다림의 메시지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나에게 큰 감동으로 남아있다.
   “나는 내일이 있음을 믿고 기다릴 거야”
   연극이 끝나고 스텝들이 나와 인사를 한다. 커튼콜. 사람들이 열광의 박수를 보낸다. 나도 손바닥이 아프도록 박수를 쳤다. 옆자리의 남편이 손을 꼭 쥐었다.
   연극이 끝날 때마다 인사를 하던 연출가가 안 보인다. 몸이 불편하여 못나왔다고 한다. ‘고도’와 함께 백발이 된 노 연출가를 걱정하며 극장을 나선다.
   작가 사뮤엘 베게트는 깊은 절망의 원형을, 연출자는 그 위에 ‘절망의 숨소리’를 촘촘히 비벼 넣었고, 연기진이며 스텝 모두의 손길이- 과연 오랜 내공이 가득한 좋은 작품이라고 공감했다.
   “역시, 연극은 영화보다 한 수 위인 예술이야”
   영화가 본업인 남편의 한마디가 최고의 찬사로 들렸다.
   우리는. ‘고도씨’의 외로운 손을 잡고, 홍대 앞 젊은 향기를 마시며 밤의 골목길로 들어선다. 넘치는 젊은이들 틈으로 울긋불긋한 노점의 백열등들이 현란하게 다가온다. 젊은이들이 저마다 솜씨를 자랑한 수제품 목걸이, 팔찌, 머리핀들을 골라본다. 남편은 어느새 모자帽子코너에서 학생들과 어울려 있다. 한 패의 젊은이들이 포차를 둘러싸고 깔깔거린다, 오뎅이며 컵밥이 맛있어 보였다.
   우리는 예정했던 저녁식사를 지우고 길가의 장난감 같은 식당 출입문으로 들어섰다. 실내 가득한 젊은 연인들 속에서 이름도 모르는 메뉴판을 뒤척여본다. “뭐로 드릴까요?” 나는 주저 없이 청년에게 말했다.
   “저 연인들이 먹는, 저것으로 주지!”
   무슨 음식인지는 모르지만 이것저것이 섞인 퓨전 음식 같은데 맛은 별스런 데가 있었다.
   밤에 본 홍대 앞 골목길은, 젊고 씩씩하고 밝고 명랑해서 좋았다. 기다리던 ‘고도’씨가, 바로 저편에서 소리치며 달려오는 것만 같았다.

 

 

김한분  -----------------------------------------

   충남 아산 출생, 《한국수필》(2000년), 《수필과 비평》(2004) 신인상으로 등단, 수필집 《달이 보이는 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