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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 2012년 가을호, 신작수필18인선] 목놓아 부르고 싶었던 애국가 - 박영자

신아미디어 2012. 11. 20. 18:37

“우리네 인생은 먼지와 같은 것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나는 어떤 후회도 하지 않는다.”

 

 

 

 

목놓아 부르고 싶었던 애국가

 

   책자와 함께 최재형 선생의 장학회 팸플릿이 배달되었다. 하루에도 몇 권씩 배달되는 책들을 그때그때 읽지 않으면 쌓이기 십상이라 보내준 작가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에 잠을 설치며 읽는다. 그런데 오늘 받은 책자는 책이 아닌 최재형의 일대기를 담은 팸플릿이어서 앉은 자리에서 다 읽었다. 나라를 위해 치열하게 싸우다 목숨을 바쳤던 많은 애국지사들을 알 만큼은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왜 나는 최재형 의사를 지금껏 모르고 있었던가. 그의 인품에 끌려 다른 책자를 찾아보았다. 애국지사들의 업적을 객관적인 시각에서 보다가 주관적 입장에서 읽으니 지사적志士的인 그의 인품을 경외敬畏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계 어느 나라에도 일본을 우리처럼 우습게 보는 나라도 없다. 36년간 일본의 침략을 받은 지 67년이 지났어도 우리는 아직도 그들의 치욕적인 만행을 잊을 수가 없다. 그런데 50년 동안 대만을 통치했던 일본에 대해 젊은이들은 우리처럼 원한을 갖지 않고 오히려 우호적이라고 한다. 그들과 우리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의분하지 않는 국민성에도 관계가 있겠으나 젊은이가 나라를 위해 의분하는 것은 국가의 미래가 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민족성의 자랑을 말하라면 나는 당연이 이 점을 내세울 것이다. 애국심이 후손에게 물려줄 유산이라면 그보다 값진 유산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평생을 벼르던 일/ 이제야 끝났구려/ 죽을 땅에서 살려는 것은/장부가 아니고말고!/ 몸은 한국에 있어도/ 세계에 이름 떨쳤소./ 살아선 백 살이었는데/ 죽어서 천 년을 가오리다.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을 때 중국 국가 주석인 원세개가 ‘5억 중화인이 해내지 못한 일을 조선 청년이 해냈다.’고 찬양하며 쓴 시다. 입장을 바꾸어 본다면 일본의 거목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으니 이 당시 일본의 감정은 대만 국민에게 대했던 정치 처사와는 달랐으리라. 개인의 행위였겠으나 김소운 선생의 수필집 속에는 이런 말이 있다. 나룻배 속에서 발바닥을 일본인 눈에 띄게 앉았다는 이유로 조선 청년이 발길로 체이는 수모를 당했다. 대항하지 못하고 수모를 당하는 청년도 미웠지만, 본체만체 딴전만 피우던 배에 탄 동족들이 더 미웠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커서 어른이 되면 맨 먼저 분노하는 자가 되리라고 하였다. 그러나 개인의 분노가 나라를 대신할 수는 없는 일, 아직도 일본은 침략의 죄책을 참회하기는커녕 걸핏하면 독도가 저희 것이라는 억지를 일삼고 있다. 그들의 만행을 보고 있으면 애국지사들의 죽음이 헛된 것만 같아 안타깝고 죄스러운 마음뿐이다.
   “우리네 인생은 먼지와 같은 것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나는 어떤 후회도 하지 않는다.” 

   러시아 진압이라는 목표로 일본군에 체포되어 취조도 재판도 없이 총살당하던 최재형이 남긴 마지막 말이다. 딸들이 아버지의 시신을 안고 원수를 갚겠다며 몸부림치던 장면이 눈에 어른거려 그의 일대기를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1860년대 함경북도 경원에 심한 기근이 들자 노비 출신인 가족은 아홉살 된 아들 최재형을 데리고 러시아의 연해주 지신허에 도착한다. 어린아이에게 배고픔을 참기란 가혹한 형벌과도 같았다. 무작정 집을 나선 최재형이 걸어간 곳은 포시에트 항구였다.
   헐벗고 굶주림에 쓰러져 잠든 아이를 러시아인 세모뇨비치 선장이 데려다가 양아들로 삼았다.
   친아들과 다름없이 자란 최재형은 러시아 학교에 입학하여 학문을 닦고 아버지를 따라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남부를 돌며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였다. 한인들이 거주하는 연해주는 원래 척박한 땅이었으나 러시아의 군사도시가 되면서 활기를 띠었다. 러시아 정부는 러시아어에 능한 최재형에게 군납을 하도록 허락한다. 최재형이 납품한 소만 해도 한 달에 150마리였으니 그 외의 모든 생필품의 양이 상당했을 것이다. 사업으로 성공한 그는 누구에게나 권위의식 없이 동등하게 대해 서른넷에 러시아도현(우리나라의 군수)에 선출된다.
   많은 부를 쌓았으니 안주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는 일제가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강제로 을사보호조약을 맺은 사실과 헤이그 밀사사건을 계기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군대마저 강제로 해산시키는 일본의 만행을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독립운동의 성공은 무저항이나 이론이 아니라 그를 뒷받침할 경제적 힘이 있어야 함을 강조하고 지금까지 쌓았던 재산을 나라를 위해 쓰기로 하였다.
   먼저 해외에 흩어져 있는 동지들을 모아 자택에서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하고 일본 소총에 비할 수 없는 최신형 무기를 갖추었다. 신형무기를 사용한 의병들은 회령전투에서 일본군 100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거두면서도 의병의 피해는 부상 4명뿐이었다. 배후의 인물이 최재형일 것이라는 의심을 가진 일본은 최재형을 소련의 스파이로 몰아 가깝게 지내던 러시아 관리들과의 교분을 끊어 놓았다. 더 이상 무기를 보급받을 수 없게 되자 그는 방향을 돌려 폐간된 대동공보大同公報를 인수하였다. 언론투쟁을 함으로써 보다 효과적인 항일 투쟁을 벌여 러시아뿐 아니라 중국,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전 세계로 조선의 독립을 알리고, 이토 히로부미를 제거하도록 주도하였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의 총알이 이토 히로부미의 가슴을 관통하는 사건이 터지자 일본은 배후 인물을 찾기에 혈안이 되었다. 그러나 안중근은 최재형이 나라를 위해 더 큰 독립운동을 하도록 고문을 견디며 의연히 사라졌다.


     “이번 일은 누구와 상의했는가.”
     “알리지 않았다.”
     “의병의 지휘관은 누구이며 어디에 있는가.”
     “지금은 어디 있는지 모른다.”
     “결국 혼자서 한 생각인가?”
     “그렇다.”


   그러나 의연하게 사라진 안중근 의사의 배후엔 최재형은 물론 그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가 있음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안중근 의사가 죽음을 앞두고 상고를 준비하자 어머니가 아들에게 편지를 쓴다. 그것은 일제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라며


     “국가를 위해 일하다 그리 되었으니
     딴 마음 먹지 말고 깨끗이 죽음을 맞이하라.”


   가슴을 저미는 아픔을 견디며 아들에게 쓴 어머니의 심정이 어떠했으랴. 편지를 읽으며 나는 얼굴을 묻고 말았다. 해마다 독립기념일이 되지만, 진심으로 자유와 독립을 위해 선조들의 희생이 어떠했던가를 잊고 지낸 일들이 부끄럽기만 하다. TV에서 어느 국회의원이 애국가는 그저 많은 노래 중의 하나일 뿐이라고 하는 걸 보고는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나라를 부정하는 것은 부모를 버리는 패륜이다. 순국선열들의 탄식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박영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