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에 휘몰아친 바람에 무슨 이유가 있을까. 바람을 다 보내고 나니, 누워 있기도 힘이 드는 늙은 육신과 자손만 남았다."
삶은 오고 간다
우리 집은 나란히 줄지어 있는 다섯 채의 집 중에서 가운데 자리잡고 있다. 동네 사람들은 ‘세 번째 집’ 이라고 부른다.
첫 번째 집에 사는 할머니는 나만 보면 커피를 내어준다. 빈속이건 식전이건 상관없이 권하는 커피를 나는 마다치 않는다. 자신의 살아온 얘기 하는 걸 즐기고, 자식과 손자들 자랑에 여념이 없다. 못난 자식이 하나도 없고, 잘되지 않은 손자도 없다. 할머니의 자손 자랑을 나는 기꺼이 듣는다.
동학만 안 겪었지, 난리란 난리를 죄다 겪고 험난한 세월을 살아왔다고 말씀하신다. 6·25 전쟁 때의 무섭고 끔찍했던 경험담 몇 개는 소설책에서 읽었음 직한, 딱 그 정도의 얘기이다. 내가 소설로나 알고 있는 이야기가 할머니에게는 현실이었다.
식민지 시절과 전쟁을 비롯하여 험난한 세월을 건너온 할머니는 삶이 그토록 모진 이유를 알 수 없었나 보다. 자신은 아무래도 하늘에서 죄를 너무 많이 지어서 땅으로 쫓겨난 모양이라고 했다. 그렇지않고서야 어찌 그토록 징글징글한 삶을 살았겠느냐고.
생에 휘몰아친 바람에 무슨 이유가 있을까. 바람을 다 보내고 나니, 누워 있기도 힘이 드는 늙은 육신과 자손만 남았다. 그녀가 이룬 업적이라고는 자식들 키워낸 것과 모진 세월 목숨 부지하고 살아낸 것밖에 없다. 그러나 이것은 그녀의 훈장이다. 남들도 다 한 일이라 내놓고 자랑할 만한 것은 아니겠지만, 자신의 땀과 눈물로 세운 성城이니 어찌 거룩하지 않겠는가.
3층짜리 집에 사는 큰딸, 공장도 있고 넓은 땅도 있는 작은딸, 세상에 둘도 없는 효자 아들, 어디 좋은 데 취직한 손녀, 1등만 하는 손자이야기를 할 때의 목소리는 사뭇 당당하고 자랑스러움이 흘러넘친다. 이들은 할머니의 성城을 지키는 늠름한 장군들이다.
83세. 할머니의 가슴속에는 소설이 들어 있다.
다섯 번째 집에 사는 여자아이는 부모가 이혼해서 할머니, 할아버지와 산다. 이혼이 흔한 세상이라 별스럽게 보이지도 않았다. 할머니는 자신이 엄마만 하겠느냐며 자조하시지만, 손녀 곁을 지켜주는 것 만으로도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싶다. 가까이 사는 아이의 고모가 늘 왕래하는 것도 부모의 빈자리를 채워주기에 모자람이 없어 보인다.
할머니 품만 알아서 다른 사람에게는 곁도 안 주던 아이가 우리 식구들과는 금세 친해진 거라고 한다. 볼일 보러 나갈 때나, 가까운 곳 나들이할 때면 종종 아이를 데리고 나섰다. 우리 집에서 밥도 먹고, 몇 시간씩 놀기도 하는데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그런 아이를 대견하고 신기해한다.
할아버지가 술 드시고 우리 집에 걸음을 하셨다. 당신 손녀 알뜰히 살펴주고 예뻐해 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고. 사실은 몹시 깐깐한 성격의 할아버지가 고맙다고 몇 번이나 말씀하시고는 비틀비틀 걸어 나가셨다. 고마워하기는 할머니도 마찬가지여서 먹을 것만 있으면 우리 집으로 가져오신다. 그게 고마워서 우리는 그집 식구들에게 저녁을 대접했다.
며칠 후, 할머니가 저녁을 사주겠다고 하셨다. 맛있는 음식에 술도 기분 좋을 만큼 마시고, 할아버지가 원하셔서 노래방까지 갔다. 나야 옛날 노래만 즐겨 부르는 사람이니 어르신들과 가는 것이 하나도 부담스럽지 않았다. 그러나 구식인 나도 생소하리만치 오래된 노래를 부른다. 그것들이 내게는 노래로 들리지 않고 삶에 대한 경구로 마음에 닿는다. 할머니가 부르는 옛날 노래를 어린 손녀가 따라 부른다. 함께 지내온 시간을 그렇게 증명한다.
할머니께서 허리가 아프다고 하더니, 며칠 뒤에 수술 날짜를 받아 놓으셨단다. 병원에 가고 없는 동안 어린 손녀가 걱정되어 우리에게 부탁할 겸 밥을 사준 것이었다. 할머니가 병원에 가시기 전날, 손녀를 더 살뜰히 보살피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할머니가 병원에 간다는 사실을 알고, 손녀는 자꾸 울더란다. 병원에 안 가면 안 되느냐고.
할머니는 병원으로 가셨고, 할아버지와 고모 그리고 우리 식구들은 아이에게 매달린다. 할아버지는 그 좋아하는 술도 손녀를 돌봐야 한다는 생각에 마다하신다. 고모는 장사하는 가게로 돌아가야 할 시간인데 어린 조카가 떨어지지 않으려 하자, 과자 한 봉지 사주고 가려고 차에 태운다. 그걸 내가 말린다. 과자 주고 나면 또 헤어져야 하는데, 그때라고 곱게 보내주지 않을 것 같아서다. 우리 집에 가자고 하니 순순히 따라나선다. 우리 애들 시험기간이라 신경이 쓰이면서도 아이를 나 몰라라 할 수는 없다.
밤 아홉 시가 되었다. 아이가 집으로 가야 할 시간이다. 데려다 주려고 마당을 나서는데, 어둠 속에서 할아버지가 손녀를 데리러 오시는 모습이 보인다. 인사를 하면서 아이는 아직 웃고 있지만, 잠결에 할머니의 빈자리를 느낄 것만 같아 불안하다.
6세. 아이의 가슴속에는 쓰일 소설이 들어 있다.
안지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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