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날 그리 만들었을까? 어떤 매력이 있어서 내 마음을 텃밭에 붙잡아 두었을까?"
텃 밭
장마가 시작되려나 보다. 밤새 짜락대던 소리에 잠을 설치다가 베란다 쪽 창문이 환해오자 그만 일어나고야 말았다. 대충 씻고 주차장으로 내려가니 여섯 시쯤 됐나? 사무실에 도착하니 그새 빗줄기는 멈추고 대신 잔뜩 물 먹은 하늘이 낮게 내려와 있었다. 혹시 몰라 우의를 꺼내 입고 사무실 뒤의 텃밭으로 향하는데 살구나무에서 물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상추밭이 시야에 들어왔다. 예상한 대로 밤새 내린 비에 상추 이파리가 흙투성이다. 고추와 다른 건 괜찮은 것 같은데 흙을 뒤집어쓴 상추 이파리는 다 따 줘야지 안 그러면 삭아버린다. 이내 허리를 구부리고 앉아 상추 잎을 따기 시작했다.
늦은 봄이었나? 뭘 고물거리길 좋아하는 성격이라 사무실 뒤편 언덕에 망초 등이 무성한 빈터를 발견하고 손뼉을 쳤다. ‘됐다. 여기에 텃밭을 갈아 보자. 상추도 심고, 고추랑 방울토마토도 심어 보자.’ 하고 생각하니 입가에 미소가 돌고 비밀을 간직한 사람처럼 가슴이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매일 퇴근 후 땀을 흘린 덕으로 사흘 정도 걸려 크진 않지만 아담한 내 영토가 완성됐다. 그런데 문제가 생겨버렸다. 삽질과 괭이질을 생전 안 해본 사람이 미련스레 휘둘러댔으니 탈이 안 나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지……. 옆구리가 결려 병원을 찾았더니 담이 왔단다. ‘허허’ 소가 웃을 일이다. ‘무슨 남자가 삽질 몇번했다고 담이 다 찾아와?’ 그냥 나이 탓으로만 돌리기에는 억울했다. 여행도 많이 다니고 트레킹도 자주 하는 편인데, 하긴 그 무렵은 정년퇴임을 몇 달 앞둔 직원이 전입 와 나까지 좀 침울해져 있을 때니 심약한 마음이 담도 불렀으리라. 어찌됐든 난 나의 영토에 상추, 고추, 방울토마토를 심었다. 처음에 모종을 옮겨왔을 때는 ‘저게 언제 크지?’ 하는 생각에 아득하기만 하더니 요즘은 여러모로 효자 역할을 한다. 몇몇 직원들끼리 따로 갖는 점심시간에는 이만큼 밥맛을 돋우어 주는 원군이 없는 것 같다. 내 손으로 키운 걸 직원은 물론이고 집에 가져와 아들과 먹는 재미도 쏠쏠했다.
그렇지만 농사가 어디 그리 만만한 일이던가? 밭작물은 농부의 장화 소리를 듣고 큰다고 했다. 물도 부지런히 줘야 되고 풀도 자주 뽑아줘야 한다. 그뿐인가? 성장을 위해선 적당히 솎아줘야 되는데 뽑힌 채소를 보면 아깝고 서운하기 그지없다. 내 심정도 이런데 하물며 농사를 업으로 하는 농부들은 어떨까? 요즘은 아침 일찍 출근하면 텃밭으로 달려가 물부터 준다. 그래야 마음도 편하지만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채소들을 보면 신기하기도 하고 뿌듯해지기 때문이다. 마치 사춘기 때 훔쳐만 보던 여학생이 말이라도 걸어오면 뒤돌아서서 몰래 웃음 짓던 것처럼…….
하지만 상추는 장마가 오면 끝물이다. 다 녹아버리기 때문에 더 이상은 따 먹을 수 없다. 물론 이모작도 있지만 그건 전업 농부들이나 가능한 일이다. 내겐 그래도 상추 농사가 제일 만만했는데 상추가 끝나면 무엇을 할까? 방울토마토와 고추도 있지만 어쨌건 텃밭농사의 재미는 반감되고 말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는 상상하기 싫다. 그간 아니 앞으로도 얼마 동안은 더 나의 심신유희心身遊戱에 텃밭은 공헌을 계속할 것이고 또 나도 텃밭 모퉁이에 구부리고 앉아 푸성귀와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요즘은 걸어가다가도 괜히 중얼거리거나 빙그레 미소 지을 때가 많이 있다.
무엇이 날 그리 만들었을까? 어떤 매력이 있어서 내 마음을 텃밭에 붙잡아 두었을까? 물론 세월이 많이 흘러 마음이 약해진 탓도 있겠지. 정년퇴임이 가까워진 나이도 그렇고, 딸아이마저 출가시키고 보니 쓸쓸하기도 하고 허전하기도 했겠지. 그뿐이었을까? 정말 나의 적적함을 달래보려는 자구책만이었을까. 혹시 작물이 가지고 있는 정직함이 맘에 들었다거나 텃밭 모퉁이에 앉아 있는 또 다른 나를 발견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작물은 농부가 돌본 만큼 자라고 가꾼 만큼 수확을 낸다. 텃밭에 앉아 김을 매면서도 얼굴에 언뜻언뜻 실낱 웃음을 띄우는 나는 세상 이치에 순응해 살면서도 가끔은 남모르는 에너지를 축적하고 싶어하는 나의 다른 모습이리라. 말없이 찾아와 말없이 앉아 있다 가는 나의 가슴엔 나도 모르는 자신감이랄까? 새로운 기운 같은 게 명치끝에서부터 꿈틀꿈틀 치올라오는 것을 느끼니까…….
이렇듯 텃밭은 어느새 나를 깊숙이 비집고 들어와 발끝까지 점령하고 있다. ‘겨울이 와서 더 이상 텃밭을 계속할 수 없으면 어찌하나?’하는 생각을 잠깐 한 적이 있다. 하지만 꼭 눈에 보이는 텃밭만이 텃밭은 아닐 것이다. 마음속 깊숙한 곳에다 텃밭을 가꾸면 된다. 봄이 오면 씨 뿌리고, 모종을 옮겨서, 물 줘가며 김도 매고 가꾸는 그림을 미리 그려보는 것도 훌륭한 텃밭농사가 아니겠는가. 그러면 언제 어디서건 마음 한 자락 깔아 놓을 수 있을 것이다. 다습한 바람이 풀 냄새를 물고 코 밑을 지나간다. 나를 당기고 머무르게 하는 곳…….
마음속 한귀퉁이에 텃밭은 늘 가꾸면서 살 일이다.
김 광 ----------------------------------------------------
'월간 좋은수필 > 좋은수필 본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좋은수필 2012년 가을호, 신작수필18인선] 눈물어린 졸업장 - 박종숙 (0) | 2012.11.20 |
|---|---|
| [좋은수필 2012년 가을호, 신작수필18인선] 삶은 오고 간다 - 안지영 (0) | 2012.11.15 |
| [좋은수필 2012년 가을호, 신작수필18인선] 길 - 이현재 (0) | 2012.11.14 |
| [좋은수필 2012년 가을호, 신작수필18인선] 비오는 날의 외출 - 장수영 (0) | 2012.11.12 |
| [좋은수필 2012년 가을호, 신작수필18인선] 저놈 중 만들지요 - 박양근 (0) | 2012.11.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