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좋은수필/좋은수필 본문

[좋은수필 2012년 가을호, 신작수필18인선] 길 - 이현재

신아미디어 2012. 11. 14. 16:55

"지나온 길 중에서도 사연이 많은 길이 먼저 떠오르는 것은 그 길 속에 고된 나의 삶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길

 

   어둠이 짙게 깔린 퇴근길,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차량들이 꼬리를 물고 있지만 반대 방향은 차량이 뜸해 한가롭기만 하다. 멀리 굽은 길로 가로수를 세며 다가오는 자동차 불빛이 먼 기억 속 길을 떠오르게 한다.
   중학교 때, 여름방학이 시작된 어느 날이었다. 제물포에서 학교에 다니고 있는 친구의 형을 만나기 위해 왕복 차비만 준비한 채 친구와 함께 기차를 탔다. 멀리 가본 곳이라곤 언젠가 무작정 시내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갔다 온 것이 고작이었다. 기차를 타고 간다는 말을 들은 그날, 기차여행에 대한 설렘과 낯선 곳에 대한 호기심으로 집에서 제법 떨어진 구름다리를 찾아가 어둑해질 때까지 지나가는 기차를 세며 꽁무니를 바라다보았다.
   다음 날, 서울역에서 출발한 기차는 도시 위를 떠가듯 달려 나갔다. 창문 너머로 건물이며 차들이 앞을 다투어 뒤로 지나쳤고, 따라오는가 싶던 먼 산이 사라지면 새로운 산이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들뜬 마음에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정차하는 역마다 내리는 사람들과 함께 내려 주위를 살피고는 다시 올라탔다. 어느 간이역에서는 타고 내리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다. 큰 열차가 나 때문에 정차한 것 같아서 공연히 겁을 먹고 얼른 올라타고는 친구와 함께 다른 객실로 몸을 숨겼다.
   긴 시간 놀이기구를 탄 기분으로 제물포역에 내렸다. 대합실에 북적거리던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갔지만 형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친구는 나중에서야 약속시간을 정하지 않고 집에서 출발하는 날짜만 형에게 알려줬다고 했다. 혹시 더위를 피해 밖에서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밖으로 나가 주변을 살폈지만 아스팔트에서 뿜어져나오는 뜨거운 열기뿐이었다. 달리 연락할 방법도 없고,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대합실을 들락거리며 형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몇차례 지나가는 열차로 승객들이 빠져나갔지만 여전히 형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합실에 걸려 있는 시곗바늘이 오후 5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혹시 약속을 잊어버린 것은 아닐까. 시간이 흐를수록 대합실 의자에 꾀죄죄한 몰골로 잠자고 있는 노숙자의 모습이 더욱 크게 보였다.
   10분만 더 기다려보고 그래도 형이 나타나지 않으면 어두워지기 전에 돌아가기로 했다. 그렇게 연장하기 시작한 10분이 한 시간이 지나도록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돌아서면 바로 형이 나타날 것만 같았고 무엇보다 형을 꼭 만나야만 했다. 오는 길에 더위를 참지 못하고 얼음과자를 사먹는 바람에 돌아갈 차비가 부족했다. 남은 돈을 합쳐도 한 사람의 기차요금도 되지 못했다. 형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우리는 걷기로 했다. 몇 시간이나 걸어야 하는지,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막막했지만 철길을 따라 왔던 길로 되돌아가면 집에 갈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 출발했다. 혹시 우리가 떠나고 난 후에 형이 오지 않았을까, 두 번이나 대합실로 되돌아가 보았지만 형은 보이지 않았다. 숫기가 없는 탓도 있지만 역 주변에 불량배들이 많다는 말을 들은 기억 때문에 부족한 차비를 구걸해 보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길을 나설 때 불량배들이 등 뒤에서 불러 세우지나 않을까 조마조마하기까지 했다.
   철길을 따라 걷는 것은 별 어려움이 없었다. 가는 도중에 역이 나타나면 역무원 눈을 피해 돌아가는 것 외에는 한적한 길이었다.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해바라기, 군락을 이룬 사루비아, 금잔화, 이름을 알 수 없는 갖가지 꽃들이 반겨주었고 밭둑길은 옥수수며 들깨 잎들이 지루함을 달래주었다. 같은 방향으로 가는 열차를 만날 때에는 멀어져가는 기차 꽁무니를 향해 손을 흔들며 여유를 부려 보기도 했다.
   어느 작은 도시에 도착했을 때, 날이 어두워 철길을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었다. 그곳부터는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를 따라 이정표를 보고 서울 방향으로 계속 걸었다. 그것도 잠시, 어두워서 더 이상 이정표마저 보이지 않았고 그날따라 달빛도 없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멀리 가로수 사이로 반짝이며 다가오는 자동차 불빛이 유일한 이정표였다. 굽은 길이 끝나고 나면 또다시 굽은 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지쳐가는 만큼 불빛은 더욱 먼 곳에 있었고, 길어지는 침묵과 지루함은 친구와 함께 걷고 있다는 사실마저 잊게 했다. 그나마 길 끄트머리의 불빛이 가득한 도시가 가끔씩 우리를 반겼다.
   얼마나 걸었을까, 마침내 눈에 익은 버스가 정류장에 멈춰섰다. 버스 색깔로 보아 서울행임을 알 수 있었다. 반가운 나머지 다가오는 버스를 향해 정신없이 뛰어 무작정 올라탔다. 하지만 버스는 곧바로 종점으로 들어섰다. 너무 늦은 시간이라 나가는 버스는 없다고 했다. 실망감으로 기운이 빠지고 다리가 풀려 더 이상 걸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불빛을 따라 걷고 또 걸어 온 곳이 오류동이었다. 개울 건너 벽돌을 높이 쌓아놓은 곳이 보였다. 우리는 그곳으로 긴 의자를 들고가 머리를 양쪽으로 두고 몸을 서로 겹쳐 누워 노숙했다. 다음 날 새벽, 자동차 엔진 소리에 잠을 깼다. 그리고는 곧바로 출발하려는 버스에 올라탔다. 기억 속에 지워지지 않는 노숙이었고, 처음으로 타본 첫차였다.
   나에게 ‘길’ 이란 단어는 앞으로 가야할 길보다 지나온 길들을 먼저 생각나게 한다. 지나온 길 중에서도 사연이 많은 길이 먼저 떠오르는 것은 그 길 속에 고된 나의 삶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때때로 가던 길을 멈추고 뒤돌아보게 하는 어느 순간의 삶이란 인생의 간이역 쯤에 도착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한다. 아직 기차는 멈추지 않았으므로.

 

 

 

이현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