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차가 있어야 물이 흐르듯이 어쩌면 연인 간의 애정도 차이가 있어야 정체되지 않고 늘 신선한 것일지 모른다"
지구와 나눈 사랑
처음엔 사소한 습관들을 하나둘씩 바꾸었다. 줄줄줄 저항 없이 흐르는 수돗물의 꼭지를 꼬옥 잠그고 개수통에 담긴 물로 설거지를 했다. 그 살뜰한 모습이 흡사 우물가의 아낙 같았다. 머리를 감을 땐 샤워기에서 뿜어 내리는 물줄기를 양보하고 대야를 꺼내 썼다. 여태 폭포수 아래의 선녀인 양 조금도 물에 구애받지 않고 살았는데……. 수질 오염의 원흉으로 손꼽히는 샴푸는 절대로 사용하지 않았다. 폐유를 모아 천연 비누도 만들어보았다. 집을 비울 땐 전기 플러그를 뽑기 위해 가구 뒷면을 더듬거리곤 했다. 왜 안 하던 일을 하느냐고 의아해하는 식구들 앞에서 환경보호 위원장이라도 된 듯이 우쭐거렸다. 작은 것부터 실천해야 큰일을 하는 법이라고 큰소리를 쳤다. 겨우내 씌워둔 에어컨 커버를 벗기는 대신 선풍기를 몇 대 더 사들였다. 엘리베이터를 사절하고 걸어서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했다. 장바구니를 챙기는 일 따위는 조금도 어렵지 않았다. ‘자나 깨나 지구사랑’ 그런 구호를 혼자 읊어도 보았다. 그래도 뭔가가 미진했다. 사랑이란 명사이지만 동사로 쓰일 때 가장 빛난다고 하지 않던가? 내가 상대를 사랑한다면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할 것 같았다.
그런 결심으로 차를 팔았다. 가뜩이나 기름 값이 나날이 오르는 터라 아쉬울 게 없었다. 출퇴근은 지하철을 이용하기로 했다. 제일 먼저 발레리나 슈즈처럼 납작한 신발을 장만했다. 하이힐을 신어야만 숙녀란 생각에 여태 굽 높은 구두를 신고 뒤뚱거렸지만 단화를 신어보니 가뿐했다. 땅에 발이 닿을 때마다 지구와 쪽쪽 입을 맞추는 느낌이라면 과장일까? 걸으면 다리가 튼튼해지고 몸매가 예뻐지니까 사랑에 빠진 보람이 있었다. 내 사랑은 늘 그랬다. 상대가 어찌 생각을 하건 말건 혼자 일방적으로 몰두하는 특징이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언니가 사귀던 남자 대학생을 좋아했을 때에도 중·고등학교 때 담임선생님을 연모했을 때에도 나중에 산부인과 교수님에게 마음을 빼앗겼을 때에도 오직 혼자서 하던 짝사랑이었다. 그래도 그 덕에 공부를 열심히 하고 상대에게 예쁘게 보이도록 애썼으므로 짝사랑은 긍정의 효과가 있다고 믿고 살았다. 지구를 사랑하는 느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걷다 보면 밀려오는 아까시 향기는 지구가 내게 뿌려준 향수 같았고 장미가 가득 핀 골목길을 걸어가면 그건 지구가 내 목에 걸어준 화환 같았다. 다분히 자아도취적이고 아전인수격인 해석이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지구는 명백히 나의 연인이었다. 그 누구라도 정확히 같은 양의 감정을 주고받는 사랑은 없을 것이다. 열렬한 연인사이에도 한쪽이 다른 쪽을 더 사랑하거나 덜 사랑하기 마련이지 않은가? 낙차가 있어야 물이 흐르듯이 어쩌면 연인 간의 애정도 차이가 있어야 정체되지 않고 늘 신선한 것일지 모른다. 나는 지구를 사랑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고대철학자 엠페도클레스가 에트나 화산 불구덩이에 뛰어든 것도 불을 사랑해서 그랬는지 누가 아느냐 말이다.
지하철을 타기 위해 땅속으로 들어가면 지구와 밀착하는 기분이 들어 좋았다. 그리고 지하철엔 볼거리가 많았다. 광고 문구의 현란함과 젊은이들의 독특한 차림새에 눈길을 빼앗겼다. 또 스크린 도어를 비롯해 도처에 멋진 시구가 적혀 있어 지루하지 않았다. 땅속이라 공기가 조금 탁하다 해도, 사람이 많을 땐 비좁고 숨 막힌다 해도 아름다운 시들이 함께 있어 포근한 공간이었다.
사람들이 이토록 시를 좋아한다면 노래방에서 노래만 부를 게 아니라 ‘문학방’을 만들어 시를 낭송하면 좋을 듯했다. 마이크를 잡고 시를 읊는 내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라는 이성복 시인의 <그 여름의 끝>이 좋을까? 아니면 “살아서 그리웠던 사람, 죽어서 찾아가라고 짚신 한 짝 놓아주었다.” 라던 이생진 시인의 <그리운 바다 성산포>가 좋을까?
이렇게 ‘문학방’ 생각에 빠져 있던 날이었다. 환승역에서 내리고 보니 핸드백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리고 당연히 있어야 할 지갑이 보이지 않았다.
넋 놓고 딴생각을 하는 내가 소매치기의 표적이 되었겠지만 의외로 충격이 컸다. 단지 현금만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내 전부를 노출 당한 것 같았다. 지갑 안의 신분증을 보고 집으로 찾아올 것 같기도 하고 명함을 보고 직장으로 따라올 것도 같았다. 모골이 송연해져 타박타박 걸어오면서 나는 지구에게 당한 배신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내 애정을 몰라주는 지구를 더는 사랑하지 말아야지. 이제부턴 소매치기가 횡행하는 지하철을 버리고 다시 차를 몰고 다니며 매연이나 푹푹 뿜어야겠다.
김애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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