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단히 연마하여 몸에 익히는 것은 실수 없이 승리하고자 하는 의지요, 혼신을 다하고 머리를 써 꾀를 내는 것은 성취를 향한 정직한 열망이다."
오심誤審
제 67회 청룡기 고교야구 8강전 덕수고와 광주일고 경기의 TV중
계. 경기가 시작되고 얼마쯤 지나는 사이 나는 은연중 광주일고를
응원하는 마음이 되어 있었다. 방금 타석에 들어선 보통 몸집의 2학
년 학생 때문이었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수석을 놓치지 않은 수재
라는 아나운서의 멘트가 나를 감탄스럽게 했다. 얼마나 기특한가.
운동선수로서 전국대회에 출전할 만큼 기량을 키우면서 수석을 한
다는 게 어디 보통 어려운 일인가. 나의 지난 경험으로 미루어 봐도
그건 어지간한 노력으로는 이룰 수 없는, 엄청난 일이었다.
중학교 시절 나는 축구를 했다. 지금처럼 프로를 목표로 하는 운동
이 아니어서 대체로 우리는 수업을 빼먹고 운동하지는 않았다. 다만
전국체전 등. 중요한 도내 대항전을 앞두었을 때에 한 해 한 주일정
도 단축수업을 했다. 오전수업이 끝나면 점심을 먹고 바로 운동장에
나가 늦게까지 연습했다. 처음엔 남들과 달리 특별대우를 받는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지만 차츰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반에서 1, 2등을
다투던 석차는 10등 가까이로 밀려났다. 하지만 코치 겸 지도교사인
체육 선생님이 무서워 운동을 하지 않겠다고는 말하지 못했다. 프로
운동선수가 될 것도 아닌데……. 같은 고민에 빠져 있던 레프트윙 영
규가 어느 날 내게 제안을 했다. “야, 우리 밤에 공부하자.”
그날부터 우리는 저녁을 먹고 난 다음 몰래 합숙방을 빠져나와 빈
교실에 들어가 촛불을 켜놓고 마주앉아 빌려온 노트를 베끼면서 공
부를 했다. 물론 잠은 저 광주일고 선수처럼 3시간 정도밖에 자질 않
았다.
인근엔 겨룰 상대가 없을 정도가 된 우리 축구부는 3학년 가을 드디
어 지역대표로 대전에 나가 전국체전 예선전을 치르게 됐다. 하지만
결과는 참패. 체육 선생님은 나와 영규가 공부를 한답시고 체력을 소
모하고 운동에 전념하지 않은 탓이라며 우리 둘을 무지막지하게 기합
줬다. 그를 계기로 축구부에서 발을 빼게는 되었지만 뒤쳐진 공부가
문제였다. 밤을 새워 아무리 열심히 해도 벌충하기가 만만치 않았다.
결국 반 석차 4등으로 중학교를 졸업했다. 그런 지난날의 경험을 돌
이켜볼 때 그 광주일고 선수는 수재 이상의, 대단한 노력형의 학생임
을 나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어린 그가 무척 존경스러웠다.
그런데 4회 덕수고의 공격에서 문제가 생겼다. 1사 3루의 득점찬
스, 스퀴즈작전에 따라 타자는 번트를 댔고, 3루 주자는 번개같이 홈
으로 질주했다. 성공이었다. 하지만 주심은 아웃을 선언했다. 명백한
오심이었다.
그 명백한 오심을 보면서 나는 문득 저 주심의 고향이 호남인가하
는 불경스런 생각을 했다. 동향 팀이라고 편들고 봐주는 건가?
아웃선언을 받은 3루 주자도 감독도 심판 판정에 승복하고 그대로
경기에 임했다. 다행히 그 4회 공격에서 덕수고는 상대 광주일고의
실책으로 한 점을 얻고 그 점수를 잘 지켜 4강에 오르기는 했다. 사필
귀정事必歸正…….
우리가 운동경기에 심취하고 선수들의 일거수일투족에 열광하는
것은 승리를 향한 그들의 열정과 투혼, 그리고 완성도 높은 경기력
때문이다. 부단히 연마하여 몸에 익히는 것은 실수 없이 승리하고자
하는 의지요, 혼신을 다하고 머리를 써 꾀를 내는 것은 성취를 향한
정직한 열망이다. 이런 성실성에 오심이 있게 되면 선수에게는 치명
타요 응원하는 관중에게는 분기탱천의 배신이다.
운동경기에서 오심은 인간의 눈으로 하는 판단인 이상 누구라도
범할 수 있는 실수요 약점이기는 하다. 하지만 자기의 오심을 인정하
지 않고 옳다 고집하는 건 용납 못할 독선이다. 그로 인해 패자가 뒤
바뀌는 것은 정의로운 현상이 아니다. 지금 사회에서 가장 절실하게
요구되는 덕목인 정직과 신뢰가 그나마 남아있는 곳이 운동경기장뿐
인 터에 오심은 단연코 지양되어야 할 일이다. 결국 덕수고는 오심에
도 불구하고 4강에 오르고, 4강에서 전년도 우승팀인 북일고를 제치
고, 결승에서 신일고마저 누르고 청룡기를 거머쥐었다.
그 며칠 뒤, TV로 런던올림픽을 관전하던 중에 나는 또 똑같은 오
심에 맞닥뜨리게 됐다. 여자펜싱 에페의 신아람 선수는 준결승에서
계시計時장치의 한계와 타임키퍼의 조작 미숙으로 억울하게 패했다.
분명한 오심이었다. 한 시간 동안 신 선수는 피스트(펜싱 경기대)에
남아 울음을 삼켰지만 심판은 오심을 인정하려하지 않았고 판정도
번복되지 않았다.
그 순간 나는 한 정치인을 부지부식 간에 떠올렸다. 애국가를 인정
하지 않으면서, 주체사상을 신봉하면서, 북을 찬양하면서도 편법으
로 대한민국 국회에 입성해 많은 수의 국민들이 물러나기를 외쳐도
후안무치로 버젓이 버티는 의원. 자기만이 옳다고 믿는 대다수의 남
성들처럼 민심을 아전인수로 오판하여 국민 가슴에 찬물을 끼얹고,
분란을 일으키고, 국가 안위를 위태롭게 하는 정치인. 경기에서의 오
심·오판은 한 개인의 이해와 소속단체의 명예에 국한하는 소아적
일일 수도 있겠다지만 정치지도자의 오심·오판은 국민의 생활과 국
가안위에 관계되기에 그대로 넘길 일이 아니란 생각이 든다.
이러한 정치인, 오심임을 끝까지 인정 않는 독선적인 심판과, 문학
상에 응모했다 제외되자 심사위원에게 내용증명을 보내 경위를 따지
던 그 기본적 작가정신조차 결여된 어느 문인, 런던올림픽에서 져주
기를 하다 퇴촌당한 선수들은 모두 정의사회에서 어서 퇴출되었으면
좋겠다.
길고 긴 ‘1초 오심’ 으로 눈물을 흘렸던 신아람 선수가 심기일전하
여 단체전에서나마 은메달을 딴 것은 덕수고의 우승과 더불어 참 기
분 좋은 일이다. 심판은 공정해야 하고 경기는 당당해야 한다.
오세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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