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장돈식님의 수필과 함께 산행을 가보시지 않으시렵니까?
단장의 숲
매일 오르는 등산하는 길녘에 있는 싸리와 칡이 어우러진 숲
에 이르르면 거기에 쭈그리고 앉아 조용히 기다린다. 이전에 여기서
토끼를 본 일이 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한참 만에 숨었던 토
끼가 호기심이 발동하여 빠끔히 얼굴을 내민다. 그러다가 거기에 앉
아 있는 노인을 보고 기겁하고는 어찌나 잽싸게 도망을 치는지, ‘토
낀다.’는 말이 이래서 생겼구나 생각했다.
그러기를 몇 년, 늘 거기에 있는 사람이라는 동물이 자기를 해코
지하려는 의사가 없음을 알게 되는가 보다. 주춤거리며 달아날 자세
를 하기는 하되 사람을 빤히 바라보는 여유를 가진다. 그러다가 언
젠가 눈이 마주쳐서 사람의 시선을 피하지 않게 되면 반은 성공한
것이다. 눈이 맞아 몇 분이 지나면 그날은 그만 조용히 일어나 가던
길을 간다.
다음날 그 시각쯤 또 토끼숲 앞에서 기다리고, 눈도장 찍고, 이튿
날은 조금 더 가까이 갔다. 왕토끼 중에서도 크고, 몸집에 비해 머리
가 작고, 히프의 팡파짐한 곡선으로 보아 암컷이 분명하다. ‘토숙
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여름철 신선한 푸새와 나뭇잎을 실컷 먹는
계절인지라 토실토실하고, 암갈색의 털은 윤기가 자르르 흐른다. 짙
푸른 숲을 배경으로 요염하게 앉은 토숙이, 사람으로 치자면 팔등신
미녀가 나에게 마음을 조금씩 주는 기미가 보인다. 그때의 그 기분,
짝사랑하던 연인이 내게 마음을 연 것과 같다.
조용히 대좌, 서로 바라본다. 흑요석黑曜石보다 검고 빛나는 그 눈,
눈에도 성징性徵이 있다고 한다. 토숙이와 나의 시선이 마주쳐 점화
된 나의 미감신경美感神經은 오르가슴이 되어 온몸을 경련하게 한다.
머지않은 날에 우아한 귀언저리를 만져 보고, 등어리 근처를 쓸어
줄 수는 있을 거라는 희망에 부풀었다. 4월에 이렇게 시작된 우리의
데이트는 가을이 되어서는 팔을 뻗으면 닿을 만큼 가깝게 다가올 수
있게 됐다.
산에 오르기가 신이 났다. 오후면 만사 제쳐놓고 등산화 끈을 들
메는 나를 보고 아내는 “토숙인가 하는 년하고 잘 돼 가우? 당신은
첩년 같은 토끼를 산에 두고 아주 푹 빠지셨군요.”하며 웃는다. 설
마 투기는 아니겠지만 미상불 마음에 걸리지 않는 말도 아니다. 내
가 언제 아내에게 이토록 지극 정성으로 대했던가.
8월 하순 어느 주말 인천 집엘 다녀왔다. 3일 만인 월요일 오전,
서둘러 산에 올라 그 숲 앞에 이르러 밭은기침으로 기척을 한다. 한
참을, 두참을 기다려도 토숙이는 나타나지 않는다. 얼마를 기다렸을
까, 허탕을 치고 다음 날 다시, 그리고 그 다음 날도, 그러기를 4~5
일,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지금은 사냥철이 아닌데, 아니지 겨울에
놓았던 올무가 있어 거기에 걸릴 수도 있지. 악몽 같은 추측, 답답한
심정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여전히 그 숲 앞에서 서성이는데 뒤에서 아는 체를
하는 사람이 있다. “왜 여기 계세요. 산에 오르시지 않구.” 한다. 조
씨다. 60대의 이 사람은 IMF 여파로 부도를 내고, 지금은 저 밑 국
도 변에 있는, 역시 부도가 난 빈 호텔에 은신하고 있다 했다. 산에
서 가끔 만나 인사하고 지내는 사람이다. S대학 법대를 나왔으나 관
계나 법조계로 나가지 않고 건설업을 했다고 하며 늘 제 자랑이 대
단했다. ‘토끼가 보이지 않는다.’ 고 했더니, “아, 그 토끼새끼요. 며
칠 전에 여기서 어름어름하더군요. 산짐승이 몸에 좋다기에 해먹으
려구 이 막대기로 내리쳤지요. 그놈의 허리를 겨눴는데 빗맞았는지
뒷다리를 질질 끌며 저 숲으로 들어갔어요. 헤치고 찾아봐두 숲이
깊어 허탕쳤어요. 아깝데요.”하며 들어 보이는 참나무 지팡이가 실
팍하다.
순간 머리를 둔기에 맞은 것같이 어지럽고 창자가 땡겨서 허리를
접으며 주저앉았다. “왜 이러시나.” 하며 부축하려는 그를 뿌리칠
힘도 없었다. 이제 한 계절이 지난 엊저녁, TV에서는 춘천 근교 삼
악산 산장지기의 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초로의 그가 마당에 내려
휘파람을 불고는 땅콩이나 해바라기니 다른 씨앗 따위를 손바닥에
놓고 기다린다. 근처를 날던 곤줄박이, 박새, 딱새 따위의 작은 새들
이 날아들어 그의 머리에 ,어깨에, 팔에 앉는다. 그는 “새들도 위아
래가 있어 서열대로 먹는다.”며 아는 척도 하고 마구 행복해한다. 문
득 내 등산로 그 ‘단장斷腸의 숲’에서 토숙이와 지냈던 한때가 떠오
르며 눈앞이 뿌옇게 흐려온다.
장돈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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