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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문예연구 2013년 겨울호, 신작시] 다람쥐길 외1편 - 김재혁

신아미디어 2014. 9. 30. 17:34

계간 『문예연구』에서 김재혁님의 신작시 2편을 소개합니다.

 

 

 

 

 

 

 

 다람쥐길 외1편       /  김재혁

 

   비가 오지만 일단 창문을 열고서 안개에 싸인 산을 바라보며 다람쥐길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이 길은 전설을 향해 나 있다고 하면 조금은 과장이 되겠지만, 은유는 더 큰 시적 명료성을 위해 현실을 흐리게 만든다, 라고 한 어느 상징주의자의 말을 생각하면 그리 나쁜 과장도 아니다. 걷는다는 것의 의미를 되새겨 도로표지판 없이 만든 길이 다람쥐길이다. 굳이 현실에서 찾자면 안암동 고려대 본관 뒷길이다. 1970년대를 살던 다람쥐들이 이용하던 길을, 학생들이 더 빠른 길을 개척하기 위해 잠시 다람쥐들과 공동으로 이용하다가, 이제는 옛 다람쥐들은 후사를 북악산 산기슭에 남긴 채 전설 속으로 스며들어가고 현재의 넓어진 길 입구에는 게으른 고양이 두서너 마리가 수업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킨 학생 한둘과 함께 벤치에 죽치고 있는, 말하자면 이름만 다람쥐길이다. 다람쥐길 안쪽에는 푸른 등불들이 살고, 짙은 어둠이 은밀하게 몸을 씻고 있다고 한다면 이 또한 과장이겠지만, 고요가 노랗게 피어 있는, 검은 빗줄기 속에 천국의 음향이 흠뻑 젖어 있는, 인생의 공휴일 같은 곳을 그리워한다면, 가만히 다람쥐길이라고 되뇌어보라. 비가 오더라도 안개의 냄새를 맡기 위해 언제나 창문을 열고서 전설의 안쪽을 향해 걸어가 보라.

 

 

 

 

가을의 몸매

 

가을에 흔들리는 생은
햇빛에 묶어 놓아도 좋겠다.
붉은 집들 뒤의 파란 풍경은
공동의 영혼이라 해도 좋겠다.
몸에 줄을 매 연을 띄우는 계절,
작은 골목들을 사랑이라 해도 좋겠다.
저기 창가의 늙은 여인에게
손짓을 보내 보아도 좋겠다.
높은 담벼락 뒤의 안 보이는
모든 것을 꽃밭이라 해도 좋겠다.
한 잔의 시를 마셔도 좋겠다.

 

 

 

김재혁  --------------------------------------------
   1959년 충북 증평 출생. 1994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으로 『내 사는 아름다운 동굴에 달이 진다』 『아버지의 도장』 『딴생각』이 있다. 현재 고려대 독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