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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좋은수필 2013년 12월호, 신작수필 16인선] 여자가 말이 많아 - 김종길

신아미디어 2014. 8. 26. 17:24

"지금은 역사이래 가장 부유한 시대를 살고 있지만 누구나 만족스러운 삶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태극의 핵심 정신은 음양의 조화, 음양을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평등한 인간으로서 조화를 이루어 행복한 삶을 추구해야 한다. 그 정도正道가 무엇인가를 이제는 고민하고 해답을 찾아야 하리라."

 

 

 

 

 

 여자가 말이 많아        김종길

 

   먼 옛날 중국 주나라 때 이야기다.
   날만 새면 위수의 강가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앉은 사람이 있었다. 진종일 강물에 낚시를 띄웠지만 고기 한 마리 물지 않았다. 그의 낚시는 미늘을 잘라버린 멍텅구리 낚시였다. 애당초 그에게 물고기는 안중에도 없고 세월을 기다렸던 모양이다.
   어느 날 그곳을 지나던 주나라 문왕이 태공의 인품을 알아보고 나라의 재상으로 발탁하여 함께 궁으로 가는 길이었다. 갑자기 태공이 가는 가마를 가로막는 여자가 있었으니, 그의 아내였다. 오랜 세월 부부로 살았지만 출세도 못하고 물고기 한 마리 못 잡는 무능한 남편을 있는 대로 구박만 했다. 울면서 용서해달라고 빌었지만 태공은 여자에게 물 한 바가지를 떠오라 시켰다. 얼씨구나 용서를 해줄 모양이구나, 신명이 난 여자는 시키는 대로 했다.
   “그 물을 땅에 쏟으시오.”
   남자는 여자가 쏟아버린 물을 다시 바가지에 담을 것을 명하였다. 이미 엎지른 물을 무슨 수로 담는단 말인가. 남자는 말없이 여인의 곁을 떠나버렸다. 남편의 등을 보며 거리에 퍼질러 앉아 대성통곡을 하였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누구나 다 아는 강태공 이야기를 새삼 언급한 것은 요즘 여성 비하로 지탄을 받고 있는 모 판사 때문이다. 그는 친자매 간 공유지 분할 민사 소송에 얽힌 피고에게 “여자가 왜 이렇게 말이 많아요.” 했단다. 그 말은 피고에게 여성 비하로 모멸감을 느낄 만하다. 정작 본인보다 사건을 접한 누리꾼들의 비판이 더 거세다. 이 판사를 보며 과거 여인들이 남자에게 당한 수난사를 대비해 보았다. 
   태공의 이야기는 중학교 때 배웠다. 한번 저지른 잘못은 다시 돌이킬 수 없다는 교훈으로 기억하고 있다. 당시의 내 의식 수준은 꽤 도덕적이어서 수모를 당한 그의 아내보다 남편을 무시하고 구박한 못된 여자로 기억하고 있다. 그 일이 지금 세상에서 논의된다면 어찌 될까. 당연히 태공은 약한 아내를 버리고 출셋길에 나선 나쁜 남자로 매도되지는 않을까.
   얼마 전 강태공의 이름을 뜻밖에도 <환단고기>라는 고서에서 만났다. 그가 어느 시대 어느 나라 인물인지도 모르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한민족, 동이東夷의 조상이었다고 한다. 지금 중국에서 동북공정을 위한 역사 왜곡을 하면서 새롭게 저들의 조상으로 숭배하기 시작한 치우천황, 바로 그가 강태공의 선조다. 치우가 강수姜水에 살면서 낳은 아들이 모두 강씨가 되어 염제 신농炎帝神農 씨의 성으로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성씨라니 그의 역사적 배경이 신선하고 놀랍다.
   그가 문왕에게 발탁되어 여상呂尙으로 나라를 다스릴 때 먼저 도술을 닦고 천제지天際池에서 천제天際를 올리고 정사를 잘 펴서 역사에 남는 명재상으로 남았다는 기록이다. 아쉽다면 그런 큰 인물이 어쩌다가 자신의 아내를 함부로 버렸는지. 왠지 그에게 소박당한 여인이 가엾다는 생각이 든다. 출근하는 남편에게 물바가지를 뒤집어씌운 소크라테스의 아내 크산티페는 악처로나마 세상에 이름이 남았지만 무능한 남편을 구박하다 버림받은 강태공의 아내는 이름조차 없다. 
   어리석고 바보 같은 여자의 이미지는 이제 옛말이다. 작금의 한반도만 보아도 양陽의 시대는 가고 음陰의 시대가 왔음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나라의 어른인 대통령이 여성이고 의사, 판검사 전문 직종도 거의 절반을 여성들이 차지하고 있다. 앞으로 갈수록 여자의 사회 진출이 더 활발해질 추세임은 자명하다. 삼십 년 전 소련의 의사들 중에 여자가 열에 아홉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사회주의 국가이기에 그럴 것이라고 웃어넘겼다. 하지만 선진 열강에서 밀려드는 여성 상위의 문화는 한반도를 장악하고 있다.
   요즘에도 중학생들이 강태공의 전설을 듣는지 모르겠으나 아마도 요즘 교실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여학생들이 반발할 것이다. 재상이 되어 세상을 다스리는 남자가 왜 자기 아내를 다독이지 못하느냐고. 가족이 반대하면 재상도 마다하는 세상이 됐으니 말이다. 요즘 여성들은 남자와 같은 환경에서 배우고 자라니 활동적이고 능동적이다. 문제는 현재 젊은 여성 엘리트들이 가족의 대를 잇기 위해 출산하고 아이를 양육하며 희생하던 모성의 가치를 거부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니 우려된다. 한 번뿐인 인생, 자신만의 행복을 추구하려는 권리를 누가 막겠는가. 
   지금은 역사이래 가장 부유한 시대를 살고 있지만 누구나 만족스러운 삶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태극의 핵심 정신은 음양의 조화, 음양을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평등한 인간으로서 조화를 이루어 행복한 삶을 추구해야 한다. 그 정도正道가 무엇인가를 이제는 고민하고 해답을 찾아야 하리라.

 

 

김종길  -----------------------------------------------

   김종길님은 수필가, 의학박사, 《창작수필》로 등단. 저서 《정신분석, 이 뭣꼬》, 《속죄》